재규어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만났던 XK8 쿠페의 매력적인 스타일과 독특한 감성에 푹 빠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만났던 S타입, 다임러, XJ 등도 동급 타 차종에서 보기 힘든 재규어만의 감성이 충만했고, 각기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20년이 흘러 강원도 인제스피디움에서 재규어 F-PACE를 만났다.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재규어의 첫 SUV가 눈앞에 서 있다. 차종은 SUV지만 스타일은 영락없는 재규어 그 자체다.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규어만의 향취가 물씬하다.
프로그램의 첫 순서는 가이드 랩부터 시작됐다. F-PACE를 타고 인제스피디움 트랙을 타보는 것이다. V6 3.0 디젤의 30d부터 만났다. 재규어 XJ나 XF, XE 등에서 보던 인테리어와 유사해 낯설지 않다. 10.2인치의 ‘인컨트롤 터치 프로’는 한글화가 완벽히 이뤄졌다. 과거 어색한 폰트와 어딘가 부족했던 재규어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재규어가 자체 개발한 V6 3.0 인제니움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300마력과 최대토크 71.4㎏‧m의 제원을 가졌다. 메르세데스-벤츠 GLE 350d와 BMW X5 30d가 258마력이니 F-PACE의 제원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알 수 있다.
F-PACE는 높낮이 차이가 큰 인제스피디움의 트랙을 움켜쥐듯 달린다. 차체 움직임과 스티어링 조작을 분석해 댐퍼 설정을 조절하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 시스템이 적용된 덕분. 255/50R20 사이즈의 컨티넨탈 타이어도 믿음직한 주행에 한몫 한다. 차체의 움직임을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G-포스미터를 참고하면 운전이 더 재밌어진다.
2000rpm에서 발휘되는 높은 토크는 터보 랙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피드백이 빠르다. 반면에 이어서 타본 20d의 경우는 저속에서 약간의 터보 랙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저속에서 자주 시프트 다운(저속 변속)을 해줘야 제 힘을 발휘한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느낌이고, 20d의 파워도 일반도로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가이드 랩에 이어 짐카나 순서가 다가왔다. 코스는 비교적 단순했지만, F-PACE의 넘치는 파워를 주체하지 못하고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순위권에는 들지 못했다.
이어진 핫랩에서는 임성택 감독이 모는 차에 동승해 트랙을 체험했다. 푹 꺼졌다 치솟는 3번 코너를 지나자 임 감독이 “알루미늄 인텐시브 차체 구조의 강성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오후 들어서는 오프로드 체험이 마련됐다. 해발 1117m의 한석산 정상까지 오르는 험난한 코스다. ‘차도남’ 같은 인상의 F-PACE가 이 험한 길을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차체 높이를 조절하는 기능은 없지만, 저속(시속 3.6㎞~30㎞) 크루즈 컨트롤 기능과 전지형 프로그레스 컨트롤(ASPC)은 차체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동승자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차로 이런 길을 오를까요?”
내 대답은 간단했다. “이런 데는 랭글러가 딱이지. F-PACE는 도심에서 타야 더 어울리지 않겠어?”
거친 험로를 오르는 F-PACE의 뒷모습을 보니, 이제 막 결혼한 신부를 신혼여행도 가기 전에 시골로 데려가 밭일을 시키는 기분이다. 일을 잘하긴 하는데 안쓰럽다는 얘기다. 재규어는 도심 불빛 아래서 더 빛난다.
F-PACE의 가격은 7260만~1억640만원이다. 20d 프레스티지부터 30d 퍼스트 에디션, 35t R-스포트까지 3종류 엔진과 6가지 베리에이션이 마련된다. 이날 시승한 두 가지 디젤 모델 중에는 30d가 훨씬 좋았다.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같은 그룹의 랜드로버와 카니발라이제이션(시장 간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이에 대한 질문을 예전에 이안 칼럼에게 한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이 압권이다.
“크로스오버에 뛰어든 것은 시장이 크다는 것이다. 랜드로버와 재규어는 강조하는 부분과 스타일이 큰 차이가 있다. 사실 랜드로버 입장에서는 포르쉐에 빼앗기는 것보다 재규어에 빼앗기는 게 더 낫다.”
백정현 재규어랜드로버 코리아 대표는 이 차를 “연간 1000대를 팔겠다”고 공언했다. 주현영 홍보 담당 과장은 “랜드로버는 물량공급이 충분해지면서 숨통이 틔었다. 재규어만 치고 올라가면 된다”고 눈빛을 반짝였다. 재규어의 반격은 이제부터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