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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국악] 판소리에 충실한 미니멀리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1)

발행일 : 2016-11-13 20:50:30

국립극장과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공동 제작한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11월 11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세계적인 연출가인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 옹켕센이 연출을 맡았다.

대명창 안숙선이 판소리를 짜고, 작가 배삼식이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으며, 뮤지션 정재일이 작곡, 음악감독을 맡아 판소리의 음악적 매력을 높였다. 옹켕센과 정재일은 이번에 처음으로 창극 작업에 참여했는데, 완성도를 높이는데 참신함을 더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본지는 ‘트로이의 여인들’을 2회에 걸쳐 독자들과 공유할 예정이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미니멀리즘 창작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통해 처음 창극에 도전한 옹켕센의 콘셉트는 ‘미니멀리즘’이다. 음악적으로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내 최소화시키고,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선택이다.

판소리를 세계의 음악으로 알리고 싶다는 옹켕센의 열정은 창극의 본령 판소리에 충실한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졌는데, 판소리 고유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집중하겠다는 원칙을 세운 점이 놀랍다. 창극의 축소가 아닌, 판소리로의 집중이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발생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에 뿌리내린 장르이다. 판소리와 창극은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창극은 10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극장인 원각사 개관 무렵에, 판소리를 서구식 극장에서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이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창극은 이제 100년 역사를 가진 장르로, 장르의 형태와 내용적 정착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도 발전하면서 장르적 정착을 모색해가고 있다. 대극장에서의 대형 창극과 소극장에서의 작은 창극이 동시에 시도되고 있으며, 오페라에 가까운 창극과 뮤지컬에 가까운 창극이 모두 만들어지고 있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옹켕센의 미니멀리즘 콘셉트와 시도, 정재일의 음악적 배치는 판소리 본연의 매력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기존 스태프들과는 다른 장점을 보여준다.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과 소리북을 치는 고수가 함께 판을 이끄는 판소리 고유의 특성을 살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소리꾼과 짝을 이뤄 서사를 이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김금미 분)의 목소리는 거문고가 맡았고, 적개심에 불타는 저주받은 공주 카산드라(이소연 분)의 목소리는 대금이 맡았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절세가인 헬레네(김준수 분)의 목소리는 피아노와 연결되어 다른 톤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거문고, 아쟁, 피리, 고수, 대금, 가야금(12현, 25현), 해금, 신시사이저, 타악이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됐는데, 기존의 연주와 다른 점은 관객들을 바라보며 연주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무대를 바라보면서 연주된 것이었다. 지휘자 없이 진행된 이런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배역과 악기가 짝을 이뤄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 트로이의 통렬한 비극, 한국의 절절한 판소리로 다시 태어나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그리스 신화와 창극의 만남은 의미를 둬 해석할 수 있다. 창극과 오페라에서 창작 작품의 소재는 한국적인 것, 특히 한국 고전에서 찾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창작 창극과 창작 오페라는 동서양의 전 세계에서, 고전과 현대를 가리지 않고 소재를 발굴하여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번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도 이에 해당된다. 이는 창작의 다양성과 창작된 작품의 세계 진출, 창극의 장르 확장을 위해서도 무척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공감된 진리인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해당되는 부분이 많은 개념이다. 그러나, 더 큰 창작적 스펙트럼을 가지려면 세계적인 것을 한국적으로 만들어 다시 세계적으로 재확장시킬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고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우리의 정서로 재해석, 재창조해 성공했을 경우, 그 콘텐츠는 서양의 콘텐츠가 아닌 우리 콘텐츠라는 개념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서양의 지역적 경계,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창작에 필요한 소재와 주제를 가져와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신감과 실력이 요구된다.

◇ 전쟁의 비극, 급이 다른 노예가 되는 여전한 차별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에 패배한 나라의 여인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는 비참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여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왕족, 귀족, 하인이라는 패전 전의 신분에 의하여 패전 후에 노예의 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트로이의 여인들’ 스틸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노예들은 차라리 트로이가 일찍 무너졌더라면 이 지옥, 이 참혹함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지옥에서 지옥으로의 이동일뿐이라고 말하는 노예도 있다. 트로이가 전쟁에서 진 것과 상관없이 어차피 지옥이라고 말하는 노예도 있다.

종이 될 운명이지만, 기존의 신분이 있기에 다 같은 종이 될 수는 없다고 왕비 헤큐바는 말한다. 비참하고 외로운 왕비를 위해 트로이의 여인들에게 울라고 요청하는 헤큐바를 보면서, 고전 이야기가 가진 보편성에 놀라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흰색 의상을 입고 있었고, 트로이의 노예 여인들은 빨간 실몽당이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 실몽당이는 전쟁으로 흘린 피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동을 해야 하는 노예의 신분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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