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은 국내 판매 3위 자동차업체지만 든든한 우군을 확보하고 있다. 이른바 ‘쉐슬람(쉐보레+이슬람)’이라 부르는 쉐보레 팬들이 그들이다.
이러한 고정 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현대차나 기아차를 압도할 만한 모델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한국GM의 전신인 대우자동차 시절, 레간자를 내놓고 현대차 쏘나타를 제친 것과 지난해 경차 시장에서 스파크가 기아 모닝에 앞선 게 그나마 내세울 만한 실적이다.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신형 스파크와 말리부, 카마로, 신형 트랙스가 연이어 히트한 데 이어 이번에는 올 뉴 크루즈가 출격했다.
신차의 진면목은 8일 서울 반얀트리 클럽 & 스파를 출발해 중미산 일대 도로를 달리는 시승회에서 드러났다. 기자에게는 빨간색 ‘파티 레드’ 컬러가 배정됐다. 90년대 ‘쥐 잡아 먹은 입술’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원색이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다.
승객 공간을 최대한 넓히는 캡포워드 디자인은 매끈한 곡선을 자랑한다. 그러나 차체 뒤가 완만히 떨어지는 탓에 뒷좌석에 타고 내릴 때 머리가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대시보드는 빈틈없고 재질감도 좋다. 다만 최고급형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석만 전동식으로 조절되고 조수석은 수동식이다. 안전벨트 높낮이 조절장치가 없는 것이나 뒷좌석용 에어 벤틸레이션이 없는 점도 의외다. 이 부분은 추후 개선되길 기대한다.
시승의 하이라이트는 엔진과 변속기다. 153마력의 최고출력과 24.5㎏‧m의 최대토크는 엔진과 변속기의 찰떡같은 궁합 덕에 만족스러운 성능을 뽐냈다. 정속 주행 때의 정숙성도 만족스럽다. 터보랙(가속 지체 현상)은 크지 않다. 최대토크는 2400~3600rpm에서 나오는데, 조금 더 저회전에서 시작되도록 설계한다면 좋을 듯하다.
수동 모드로 바꿨을 때의 응답 반응은 매끄럽다. 과거 쉐보레의 모델들은 수동 모드에서 시프트 다운할 경우 경고음이 울리면서 변속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로 변속 가능한 범위가 매우 좁았다. 그러나 신형 변속기는 토크 허용 범위를 넓혀 꽤 넓은 영역에서 속 시원한 가속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점은 한국GM이 그토록 고집하던 토글 시프트를 버리고 팁트로닉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D 드라이브에서 M 드라이브로 바꾼 뒤 기어 노브에 달린 버튼을 눌러 변속하는 토글 시프트는 어색한 운전자세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난해 말리부 발표회에서도 기자가 그 문제를 지적했는데, 당시 한국GM 관계자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별로 없을뿐더러 수동 모드를 잘 안 쓴다고 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안 쓴다면 굳이 그 기능을 넣을 필요가 있느냐”고 대꾸한 적이 있었다. 이는 기자뿐이 아니고 운전을 좀 하는 자동차 담당기자들은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한국GM은 이번에 그 고집을 꺾고 기어 노브를 왼쪽으로 빼서 시프트 업, 시프트 다운을 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결과는 성공적이다. 많은 기자들이 좋은 선택이라고 칭찬했다.
인증 연비는 17인치 휠 기준으로 리터당 도심 12.1㎞, 고속도로 15.5㎞, 복합 13.5㎞다. 이는 현대 아반떼 1.6 GDi(도심 11.7, 고속도로 15.4, 복합 13.1)와 비교해 모두 우월한 수치다. 아반떼 1.6 T-GDi의 경우는 각각 10.8, 13.7, 12.0으로 역시 크루즈가 우세하다. 크루즈의 차체 중량이 아반떼보다 40~90㎏ 가벼운 것도 좋은 연비를 내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크루즈의 가격은 1890만~2478만원으로 아반떼에 비해 기본 가격이 높다. 하지만 이는 착시 현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6인치 휠이 장착된 모델을 고를 경우 아반떼는 1913만원짜리 스마트 스페셜 모델부터 가능하고 그 이하 모델(15인치 기본 장착)은 아예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올 뉴 크루즈는 15인치 휠이 아예 없고 기본 모델부터 16인치가 장착돼 있다. 반면 17인치 휠 장착 모델을 고른다면 크루즈는 2224만원인데, 아반떼는 2090만원부터 가능하다.
타이어의 경우 아반떼는 넥센, 금호, 한국 제품을 고루 장착하고 있고, 아반떼 터보에는 한국 벤투스 S1 노블2가 장착된다. 반면 올 뉴 크루즈는 16인치는 한국, 17인치는 금호, 18인치는 미쉐린 제품이 장착된다. 이번 시승에 장착된 미쉐린 제품의 성능은 만족스러웠다.
올 뉴 크루즈는 아반떼가 독주하던 국내 준중형차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자격을 갖췄다. 이미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모으며 그 실력을 입증하고 있다. ‘소리 없이 강하다’를 외쳤던 레간자의 영광을 되찾아줄지 주목된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