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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연극] ‘보도지침’ 독백! 아무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나의 진심과 진실을 마주하는 시간

발행일 : 2017-05-08 14:27:53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작, 오세혁 연출의 연극 ‘보도지침’이 4월 21일부터 6월 11일까지 대학로 TOM(티오엠) 2관에서 공연 중이다. 30년 전 언론계 흑 역사로 기억되는 ‘보도지침’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번 공연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진솔한 유머를 사용하여 관객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 관객의 참여와 집중을 유도한 인상적인 첫 장면

‘보도지침’의 무대는 법정이자 극장이자 광장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광장인 동시에 마음을 주고받는 극장이고 열린 공간의 광장이 되기도 한다. 첫 장면은 법정으로 시작하는데, 사회부 기자 김주혁(봉태규, 김경수, 이형훈 분)과 편집장 김정배(고상호, 박정원, 기세중 분)이 등장할 때, 관객들은 카메라를 꺼내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고 더 많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독려 받기도 했다.

이슈가 된 사건에 대해 법정에 많은 취재진들이 모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면서, 관객들에게는 커튼콜이 아닌 시간에 마음껏 셔터를 누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인데, 법정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겁게 시작할 수 있었지만 관객이 참여하면서 이벤트처럼 출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무대는 관객석 어디에서든 가깝게 느껴지도록 펼쳐져 만들어졌기에, 공연 초반부터 관객이 참여해 흥분하게 만든 방법은 커튼콜까지 깊숙하게 몰입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 연극이 위대한 이유는 연극에는 독백이 있기 때문이다, 법정과 연극

‘보도지침’은 법정과 연극이라는 두 개의 트랙에서 배우들이 때로는 법정의 트랙을 달리다가 어느 순간 라인을 바꿔 연극의 트랙으로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법정과 연극무대가 변화한다기보다는 동시에 질주하면서 시간에 따라 한 쪽이 부각된다고 여겨진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에서 송원달 판사(서현철, 윤상화 분)은 법복을 마치 무대 의상을 갈아입듯이 벗는데, 다른 등장인물들도 생뚱맞게 복장 바꾸기를 했다는 점은 법정과 연극의 교차 통로를 손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등장인물이 의상의 변화만으로 법정과 연극을 손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장치는 흥미롭다. 무대를 바꾸지 않아도 작은 디테일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또는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연극이라는 시공간에서 말한다는 점도 의미 있다. 법정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같은 대학교 연극 동아리 출신들인데 술을 마시기도 하고 툭하면 연극정신이라는 단어를 내세우기도 한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의 연극정신은 잘 들어보면 시대정신인데,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계속 썼으면 때론 불편할 수도 있었고 관객들에게는 방어기작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시대정신, 집단의식, 집단 최면, 집단 궤변 등 모든 이야기들은 연극정신이라는 용어로 재편되고 순화된다.

극 중 극 연극 동아리의 이야기가 나오며 모두 학교 선후배로 엮였다는 것은 장난 같은 설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무척 현실적인 상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선과 악이라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대결로 볼 수도 있지만, 결국 맨 앞에 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씁쓸해지기도 한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연극이 위대한 이유는 연극에는 독백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보도지침’을 벗어나서 생각해도 많은 것을 깨닫게 만든다. 모두 다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연극에서는 길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독백이 있기 때문에”, “연극이 위대하다. 진실을 말할 수 있어서”라는 이런 의미에서 바라보면 극장은 마음을 주고받는 곳이고 집단 상담을 받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황승욱 변호사(박정표, 박유덕 분), 최돈결 검사(남윤호, 안재영 분), 멀티 역 남자(김대곤, 최연동 분), 멀티 역 여자(정인지, 이화정 분) 또한 무대 위에서 독백과 방백을 섞어가며 독백의 위대함을 직접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안재영, 극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 최연동, 독보적인 포지션을 구축하며 인상적인 표현을 한 정인지

최돈결 검사 역 안재영은 진지함과 코믹함을 오가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집중된 정극 연기력을 발휘했다. 이런 안재영의 연기는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혼자인 법정에서 균형감을 잡아줬는데, 그의 연기력이 그 균형감을 대립이 아닌 진지함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남자 역의 최연동과 여자 역의 정인지는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고 관객석으로 퇴장해 멀티 역을 소화하면서도 무대에 계속 남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최연동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고조하고 때로는 전환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최연동의 움직임과 대사를 듣고 있으면 ‘보도지침’의 이 모든 판을 좌우하는 사람은 최연동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연극적인 연기를 강하게 표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균형과 조율, 완급조절과 강약조절을 통해 극을 이끄는 모습이 돋보였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은 한 명의 배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 배우들이 등장한다. 관객들도 대부분이 여자 관객들이다. 정인지는 남자 배우들과 여자 관객들 사이에서 자신이 맡은 다양한 배역을 표현할 때, 여성성을 강조해 차별을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자들 이상으로 남성성을 발휘해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편집국장 고문신이었는데, 차분하게 설명조로 나가다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개새끼야”라고 말하는 정인지의 모습은 몰입해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을 순간 멈추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최연동을 개 끌고 가듯 데려가는 모습에서는 차분한 카리스마가 전달됐다.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 공연사진.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도지침’은 아픈 시대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마음으로 관람하기보다는 연극의 소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많은 것으로 느껴진다.

개인의 성향과 경험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은 우리 시대가 이전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관객들 또한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독백! 아무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나의 진심과 진실을 마주하는 시간을 직접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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