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NT 영화] ‘박열’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 기록적 가치와 영화적 가치

이준익 감독의 ‘박열(Anarchist from Colony)’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일본 내각은 ‘분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이제훈 분)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박열’은 영화 초반 자막으로 밝힌 바와 같이 고증에 충실한 실화로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뜻한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의 영어 제목이 ‘Anarchist from Colony’라는 점도 눈에 띈다. 영화는 박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명하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는 흐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박열에 대해 관객들이 서서히 알아가며 감정이입해 몰입하는데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 민족주의적 정서 vs. 잘못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

일본 제국을 뒤흔든 조선 최고의 불량 청년 박열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박열’을 마주하면 일제에 항거한 민족주의적 영웅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그런 예상과 기대를 하고 영화를 관람하면 다른 정서와 마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열’은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잘못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더욱 와 닿는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는 반일 영화가 아니라고 밝힌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제훈식 유머를 통해 완급조절을 하며 영화는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쳐 피로감이 쌓이는 것을 막는다. 박열은 “일본의 제국주의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강력하게 저항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제국주의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박열의 정신세계를 이제훈은 무척 잘 표현하고 있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여자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는 “일본에서 가장 버릇없는 여자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데, 잘못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박열의 시야뿐만 아니라 후미코의 시야도 영화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일본 권력의 민낯에 대해 영화가 가능한 객관성을 유지하게 하고, 관객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인물이 후미코이다.

◇ 캐릭터에 대한 분석,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배우 최희서

‘박열’의 언론/배급 시사회 후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필자는 “아나키스트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바라보면 박열은 조선이라는 물리적인 정부를 가지지 못한 아나키스트이고, 후미코는 일본이라는 물리적인 정부는 있지만 정신적, 심리적 정부는 없는 아나키스트이다. 박열이 거부한다면 후미코는 부정한다고 생각된다. 후미코라는 인물을 소화하는데 다른 배우들과 다른 심리를 가졌을 수도 있는데, 최희서 배우의 내면에 대해 알고 싶다.”라고 최희서에게 질문을 했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최희서는 논리적이며 정리된 표현으로 후미코가 자라온 배경과 과정 속에서 피지배 계층의 설움을 그대로 받았고, 조선인처럼 핍박 박고 설움 받았다고 말하며, 후미코는 박열과 정서적으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정말 미리 준비한 것처럼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예로 들며 설명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최희서가 후미코라는 역할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대했는가가 오롯이 최희서의 대답을 통해 오롯이 전달됐다는 점이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최희서는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 가상의 일본 여인 쿠미 역을 맡았고 이번에 ‘박열’에서는 실존 인물 후미코를 소화했다.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 모두 얼마나 진정성 있게 대하면서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석하고 노력했는지가 느껴지니, 최희서가 앞으로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배우가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생겼다.

◇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 기록적 가치와 영화적 가치

‘박열’은 실제 사건,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록적 가치와 함께 새로운 소재로서의 영화적 가치도 지닌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은 민족주의와 애국심 코드에 대한 찬반 정서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소재로 원활하게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박열’ 스틸사진. 사진=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아픈 역사의 시간은 크고 작은 영화적 소재로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다. ‘박열’은 ‘동주’와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이 가진 힘을 내포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낮은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 진심을 전달하는데 화려한 볼거리는 필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된다고 말한 이준익 감독의 조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에서 박열은 사진기를 바라보고 있고, 후미코는 책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박열과 후미코가 연출한 포즈일 수도 있고, 사진사의 요청에 의해 연출된 포즈일 수도 있는데, 그 상황에서 발휘된 예술성은 박열과 후미코가 가진 정신세계를 더욱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