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산불’이 10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됐다. 기존의 창극의 형태와는 다른 형식과 무대를 선보였는데, 조선시대부터 자생적으로 발전한 판소리와는 달리 창극은 서양식 극장에서의 공연을 표방해 1908년에 처음 공연을 시작한, 지금도 장르적 고착이 확고하게 이뤄지지 않은 장르라는 것을 고려하면 국립창극단의 다양한 시도는 무척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 인간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이야기, 연극적인 매력을 살린 창극
이번 작품은 1962년에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차범석의 연극 ‘산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전후 한국사회의 현실을 온전히 드려낸 사실적인 희곡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창극으로 재탄생하면서도 기존의 정서를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연극 ‘벚꽃동산’, ‘햄릿아비’, ‘봄날’, ‘과부들’로 주목받은 연출가 이성열과 영화 ‘부산행’, ‘곡성’, ‘암살’, ‘타짜’에 이름을 알린 장영규 음악감독이 작곡에 참여했는데, 타 장르에서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창극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산불’을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산불’은 인간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이야기이다. 전쟁이라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외적 상황에 머물지 않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 남겨진 자의 슬픔에 관해 깊게 들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판소리나 창극에서의 풍류나 해학을 통해 마음껏 웃으며 긴장을 해소하는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에게 이 작품은 다소 무겁게 여겨질 수 있지만, 몰입돼 내면에 심취한 관객에게는 극에서 바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 웃음을 전담하는 캐릭터가 없다, 기존의 창극과는 다른 정서로 관람하게 된다
‘산불’에는 웃음을 전담하는 캐릭터가 없다. 핵심적인 이야기이든 실없는 이야기이든 긴장의 이완과 완급 조절을 위해 웃음을 담당하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에는 그런 희석과 완충 없이 슬픈 정서와 그 내면에 집중한다.
대밭(대나무밭)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낭만적이라기보다는 호러적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 기나긴 전쟁의 분위기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를 복장만 봤을 때는 재미있게 볼 수도 있지만, 등장할 때의 움직임과 노래는 무서운 느낌을 준다.
창극 후반부에는 까마귀의 움직임으로 잠깐 재미를 주는 시간이 있기도 하지만 ‘산불’에서 까마귀들은 대부분의 시간에 웃음을 주는 존재가 아닌 평가자, 심판자의 역할을 한다. 객관성을 지니고 관조적인 마인드 속에 핵심을 꿰뚫는 내레이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른 인물들이 아닌 까마귀는 웃음과 해학을 주는 캐릭터로 설정할 수도 있었지만, 연극적인 몰입도, 영화적인 상징성을 창극 속에서 살려내기 위해 까마귀도 다른 캐릭터들과 같은 감정선상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은, 극을 마지막까지 관람한 후 돌이켜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 웃음 대신, 극한의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으로 완급을 조절하다
‘산불’에서 부상당해 대숲으로 숨어든 규복(김준수, 박성우 분)을 점례(이소연 분)와 사월(류가양 분)이 번갈아가며 보살피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상황에서 세 명은 서로 알고 있는 삼각관계가 된다.
불륜이라고 볼 수도 있고 육체적 욕망으로 볼 수도 있는 이들의 사랑은, 과부마을이 된 산동네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의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의 절박한 마음의 선택, 육체의 선택이다. 이들의 모습은 남은 자의 떠나보내는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왜 참으라고만 하는가?”라는 사월의 외침은 단지 인간의 욕망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반목과 갈등이 첨예하게 누적된 곳에서 역사의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월 역의 류가양은 뛰어난 창 실력 이외에도 연극적 연기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비난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가 울부짖을 때 같이 울게 만드는 연기의 공감력을 발휘했다.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매력을 가진 류가양의 활약은 창극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산불’에서 규복은 점례에게 “당신이 진짜 세상, 내가 찾던 진짜 세상”이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사랑을 하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고 온전히 상대방만 남는 본질적인 집중을 김준수는 절절하게 표현했다. 절박한 상황이고 여타의 다른 개입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올인하는 사랑의 마음이 살아있었다는 점은 역사 속 슬픈 이야기로 피로감이 누적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끝까지 끌고 나갈 수 있게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
창극 속 마을 사람들이 대밭이 불타는 것에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극중 정서가 그대로 살아있는 대밭은 철거하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산불’에는 한글 자막이 제공됐다는 점도 주목되는데, 대사는 영어 자막만 제공됐고 창으로 표현된 부분은 영어 자막, 한글 자막이 동시 제공됐다.
가사전달력을 높여 관객들이 편안하게 관람하면서도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 훌륭한 선택으로, 몰입하고 있는 관객의 감정선이 창이 나오는 순간에 단절되지 않도록 한 디테일한 배려였다.
‘산불’은 유수정(양씨 역), 김금미(최씨 역), 허종열(김노인 역), 송나명(귀덕 역), 윤석한, 이광복(대장/소대장 역)을 비롯해 국립창극단의 소리꾼 48명이 펼친 소리 공력이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국립창극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선정돼 재공연되면 현재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촘촘하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