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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3) 마츠코처럼 자기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사는 사람은 많다

발행일 : 2017-11-06 02:05:54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10월 27일부터 내년 1월 7일까지 공연 중인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박혜나, 아이비 분)의 인물 소개에는 “중학교 국어선생님, 마사지 걸, 미용사, 살인자, 누군가의 딸이며 누나이고, 언니이며 애인이고 이웃이지만 자기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적혀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프레스콜에서 필자의 질문에 박혜나는 마츠코를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항상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유지하려고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마츠코 혼자일까? 그런 모습은 마츠코의 독특한 성향일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관계지향적인 선택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또 다른 마츠코는 우리 주변에 무척 많다. 마츠코의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그녀의 내면에 집중해 나보다 남이 먼저인 사람들이 또 누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 희생의 아이콘 엄마, 자신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 모성애

여자가 결혼을 해 엄마가 되는 순간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었던 강렬한 사건이다. 핵가족 시대, 소가족 시대이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는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여성이 많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스스로 혹은 사회/문화적으로 엄마를 희생의 아이콘으로 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엄마는 단지 자신보다 자식을 비롯한 가족을 우선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아예 자신은 없는 사람처럼 자식과 가족에게 헌신한다. 가족이라는 엄마라는 관계성 속에서 주변이 모두 안정되고 사랑받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챙기지 않는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자신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 모성애는 때론 주변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어느 순간 정작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의미 있게 생각되지 않으면 그간의 희생은 우울증과 답답함, 억울함으로 바뀔 수도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자신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모성애는 생물학적인 엄마에게 해당된다기보다는 엄마의 역할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다. 엄마의 역할을 어릴 때부터 한 형, 언니의 경우 동생들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맹목적으로 하다 보면 자신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공허함과 미움의 마음이 싹틀 수도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 회사에 무작정 충성하는 직장인, 가족과 자신을 버리고 매진하는 애사심

엄마가 자식과 가족에게 하는 것 못지않게 맹목적으로 희생하며 충성하는 사람들은 직장인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하고 회사를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이 많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이기적으로 자기를 챙기지 않으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원하는 성과와 보상을 얻을 수도 있지만, 경쟁 사회에서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청춘과 젊음을 다 바쳐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허전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 자신을 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사랑, 내가 없어지면 결국 나의 매력도 없어진다

열렬한 연애는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지 않고 온전히 상대방이 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연애를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모두 던져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이런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연애라고 할 수도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다 보면 결국에는 내가 없어지고 나의 매력 또한 없어질 수 있다. 내가 없고 상대만 있는 연애를 하다 보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상대를 오히려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는 연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기도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커플댄스를 출 때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도 않고 일정 거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관계에서도 나를 완전히 없애지 않아야 적정한 거리에서의 텐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 마츠코가 자기 자신을 유지했으면? 자기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였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긴밀한 관계성, 애정 어린 친밀도를 유지했으면 결코 혐오스런 마츠코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누군가에게 버림받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떠나가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더라도, 나 자신이 의미 있게 존재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받을 용기는 결국 상처받고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용기라고 볼 수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마츠코를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로 본다면 관객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마츠코가 표방하는 내면의 일관성과 진지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공감해 감동받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작품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공연사진. 사진=파파프로덕션 제공>

주변을 둘러보면 남들에게는 참 좋은 사람인데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 채 받기만 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는 노력을 한 번쯤은 해야 되지 않을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의 일생을 진지하게 바라본 마츠코의 조카 쇼(김찬호, 정원영, 정욱진 분)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쇼가 될 필요가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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