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감독의 ‘공허충(An Absurd Thing)’은 2018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상영작인 단편영화이다. 어느 날 남준(장현동 분)의 어깨에 이상한 게 생겼다. 며칠 동안 집안에만 있던 남준은 살아나가기 위해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이 영화는 시작할 때 전사처럼 펼쳐지는 세 가지의 사건이 주된 이야기의 정서를 미리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영화 초반에 그냥 나열한 것 같은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다면, 그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의 디테일을 촘촘하게 느끼면서 관람할 수 있다.
◇ 관객을 어디에 데려다 놓고 이야기를 펼칠 것인지를 명확하게 선택하는 감독의 연출법
‘공허충’은 2005년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주목할 만한 이야기 세 가지를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줌으로써 영화의 정서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빠르게 진행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세 가지 일에서의 뽑아낸 뉘앙스는 이후 영화의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감독은 관객을 어디에 데려다 놓고 이야기를 펼칠 것인지를 명확하게 선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사건은 감독이 말하려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찾은 것일 수도 있고, 각각의 사건이 모티브가 됐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모티브였더라도 사건 자체보다 이미지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재용 감독의 이런 연출법은 단편영화에서 시작부터 관객을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는데, 영화 초반을 안 봐도 영화를 보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관객들과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 다른 속도로 영화를 따라가게 만들 수도 있다.
명확한 시작과 명확한 마무리는 정재용 감독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숨 쉴 새 없이 강요하거나 주입식으로 결정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관객은 마치 시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마무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정서를 만드는 점은 무척 돋보이는 연출법이다.
◇ 다른 사람들의 반응, 변하지 않으려는 수경의 태도
‘공허충’에서 남준의 변한 모습을 본 의사(최원 분), 사장(엄지만 분), 목사(송철호 분)의 반응과는 달리 수경(박현지 분)은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콩깍지가 씌면 뭐든지 예뻐 보인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똑같이 대하려는 수경의 태도에 감동하는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좀 추해지거나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의 매력이 떨어지게 되고 상대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준에게 감정이입된 관객은 수경이의 태도에 위안을 느낄 것이다.
◇ 내 안에 괴물이 자라고 있다면?
내 안에 괴물이 자라고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공허충’은 하게 만든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괴물일 수도 있고, 내가 스스로 만든 괴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외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내면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사실 사람의 내면에는 감당할 수 있는 부분과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형태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공허충’에서 시각적인 측면이 내면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준 역의 장현동은 특수 분장을 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몰입해 연기를 하면서 실제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을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눈빛 표현은 무척 인상적인데, 촬영을 했을 때 실제 어떤 감정이었는지 묻고 싶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