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마농(Manon)>이 4월 5일부터 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아베 프레보의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앙리 메이야크와 필리프 질의 협작으로 대본이 만들어졌고, 쥘 마스네가 작곡한 오페라이다.
<마농>은 국립오페라단의 2018년 첫 작품이자, 윤호근 신임 예술감독 취임 후 첫 작품이자, 창단 이래 국립오페라단에서 초연되는 작품이다. 뱅상 부사르 연출, 세바스티앙 랑 레싱 지휘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그란데오페라합창단이 함께 한다.
<마농>에서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뜻함) 마농(소프라노 크리스티나 파사로이우, 손지혜 분)의 캐릭터의 개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마농의 기질과 내면을 이해하면 마농의 마음과 행동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알 수 있다.
A팀과 B팀의 전막 리허설 공연을 기준으로, 본지는 심리학 중 관계성에 중심을 둔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을 <마농>에 적용해 마농과 데 그리외 기사(테너 이즈마엘 요르디, 국윤종 분)(이하 데 그리외)의 내면을 살펴볼 예정이다.
<마농>에 대한 기본적인 리뷰로부터 시작해,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의 ‘참 자기(true self)와 거짓 자기(false self)’, 로날드 페어베언(W. Ronald D. Fairbairn)의 ‘분열성 양태(split position)’ 모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자기대상(self object)’ 개념을 기준으로, 총 5회에 걸려 리뷰를 공유한다.
◇ 연극적인 움직임, 프랑스 오페라가 주는 신선함
<마농>은 연극적 요소가 많은 프랑스 코미디 오페라라고 볼 수 있다. 음악과 극이 공생하고, 캐릭터의 감정은 아리아와 표정 연기를 통한 내면 표현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음악으로 캐릭터의 감정이 표현되고 움직임으로도 감정이 표현된다.
<마농>은 행진곡풍의 밝고 경쾌한 서곡으로 시작한다. 서곡을 들으면 가벼운 스텝의 업바운스 춤이 연상되는데, 제1막 처음 도입부터 상당히 연극적인 움직임과 연결해 받아들일 수 있다.
빗줄기가 흐르는 영상이 서정성을 만들 것 같지만 소동극 같은 어수선함이 있고, 무언가 훅 지나가서 입체적 영상에 놀란 것인가 하고 보면 공연장에 새가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남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식당 주인은 말하는데, 남 구경하는 무대 위 사람을 또다시 구경하는 관객 또한 따라서 역동적이 된다. 지휘자 열정적인 지휘는 그런 분위기를 고조한다.
◇ <마농>의 초반 정서를 잡는 인물은 레스코
<마농>에서 마농의 사촌 오빠 레스코는 공연 초반의 정서를 잡는 인물이다.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해석력이 뛰어난 바리톤 공병우는 레스코에 단독 캐스팅됐는데, 두 주인공을 제외한 단독 캐스팅 배역 중에는 가장 분량이 많은 역할이다.
제1막이 끝날 때쯤 되어야 마농과 데 그리외의 정서가 무대 위에 부각되는데, 그전까지 초반 정서는 레스코가 만든다. 공병우는 마농은 삶과 자기 자신에게 중독된 인물이고, 데 그리외는 사랑에 중독된 인물이고, 아버지 데 그리외 백작(베이스 김철준 분)은 가족에 중독된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다른 인물들의 중독된 정서가 수면 위로 표출되기 전에 공병우는 소동극처럼 시작된 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공병우는 진지하면서도 허당기가 있는 레스코를 거침없이 표현하는데, 분위기 있게 상의와 모자를 벗어서 걸치려고 하지만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데 그리외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하는 펜싱 동작에서도 어김없이 웃음을 준다, 실력파 성악가의 이런 유머는 몰입한 관객들에게 더욱 재미를 선사한다.
제2막 파리에 있는 마농과 데 그리외의 아파트는 공간을 확 축소시킨 느낌을 주는데, 압축된 공간은 마음의 공간, 선택의 공간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제3막 제2장 생 쉘피스 수도원의 위엄과 위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무대는 인상적인데, 무대를 회전할 때 자동으로 하지 않고 사람이 밀어서 수동으로 회전하는 것은 어쩌면 마농이 데 그리외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자동으로 되지 않고 직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 <마농 레스코>보다 매력적인, <마농>의 마농 캐릭터
푸치니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의 마농보다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의 마농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캐릭터가 확실하다는 것은 감정이입해 관람하는 관객에게 편안함을 선사한다. <마농 레스코>의 마농은 가난한 귀족 청년 데 그리외에게 충실하지 않고 늙은 부호 제론트 또한 존중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모두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마농>의 마농은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데, 더 적극적인 여성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행이 난생 처음이었던 마농에게는 두려움도 있지만 환상, 상상, 욕망이 있는데 내면을 표현하는 독창의 아리아에서 그런 면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이게 바로 저 마농의 이야기이죠”라는 표현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열여섯 살의 소녀가 주인공이 되도록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 주목된다.
목소리가 갇혀있지 않은 크리스티나 파사로이우는 시원시원하게 노래를 불렀다. 누워서도 노래를 부르고 얼굴을 바닥에 붙이고도 아리아를 수준급으로 소화하는 성악가의 모습에 감탄하게 됐는데, 이즈마엘 요르디와의 이중창 및 연기의 케미도 훌륭했다.
“이것이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라며 죽음 앞에서도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마농을 표현할 때 손지혜는 공연 초반 어깨를 움츠린 채로 낯설고 어색함을 표현하면서도, 아리아는 자신감 있게 불렀다. 마농 내면의 양면적 성격을 잘 표현했는데, 성악적인 능력도 훌륭하지만 디테일한 움직임을 표현한 연기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손지혜는 손지혜가 그냥 마농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 서로 다른 매력의 데 그리외를 보여준 테너 이즈마엘 요르디와 국윤종
“당신을 처음 봤는데, 내 가슴이 당신을 알아보네요”라고 마농을 보며 노래 부를 때 데 그리외 기사 역 이즈마엘 요르디는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다정한 말투로 부드러운 대화를 하는 모습은 그냥 20대의 번듯한 우리나라 사람 같은 느낌도 들게 했다.
이즈마엘 요르디는 수줍음과 용기를 동시에 표현해, 바람둥이가 아닌 나에게만 용기 냈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리릭 레제로 테너, 리릭 테너, 리릭 스핀토 테너의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해 캐릭터의 변화를 알려주는데, 한 명의 테너가 같은 작품에서 이런 변화를 소화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데, 이즈마엘 요르디와 국윤종은 정말 멋지게 소화하고 있다.
국윤종은 오페라에 어울리는 굵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데, 굵지만 맑은 목소리의 테너이다. 이즈마엘 요르디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각각 모두 매력적이라는 점은 긍정적이다. 국윤종은 데 그리외가 신부가 됐을 때 수도원에서 독창을 부르는데 소름 끼칠 정도로 감동적인 시간을 만든다.
크리스티나 파사로이우와 이즈마엘 요르디가 A팀, 손지혜와 국윤종이 B팀을 이뤄 각각 두 번씩 일반 공연 무대에 오르는데, 크리스티나 파사로이우와 국윤종, 이즈마엘 요르디와 손지혜가 팀을 이룬다면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