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브랜드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1988년이다. 1987년 수입차 개방이 이뤄진 후 국내 대기업들이 앞 다퉈 외제차를 선보일 때 쌍용그룹은 르노를 파트너로 택했다. 그러나 쌍용과 르노의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르노 승용차 수입을 담당하던 쌍용그룹 관계자는 “대기업의 외제차 수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 르노 승용차를 수입하지 않기로 했다”고 토로했다. 쌍용그룹이 4년 동안 판매한 르노 승용차는 49대에 불과했다.
르노는 12년 후 다시 한국시장을 노크했다. 삼성자동차를 인수해 한국에 진출한 2000년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르노가 아니라 ‘르노삼성’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웠다. 브랜드 컬러도 삼성자동차 시절의 파란색을 그대로 유지했다.
르노 브랜드가 한국에 첫 선을 보인 후 30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르노 브랜드는 다시 등장했다. 르노의 대표 소형차인 ‘클리오’가 주인공이다. 르노삼성 마케팅 담당 방실 이사는 “지난해부터 전기차 ‘트위지’를 선보이긴 했지만, 이 때는 그냥 ‘트위지’로 소개했다. ‘르노’ 브랜드가 본격 소개되는 건 클리오가 처음이다”라고 했다.
클리오의 차체 크기는 길이 4060㎜, 너비 1730㎜, 높이 1450㎜이고 휠베이스는 2590㎜다. 경쟁차인 푸조 208은 각각 3965㎜, 1740㎜, 1460㎜이고 휠베이스는 2540㎜로 클리오보다 길이만 조금 짧다.
클리오는 2012년 4세대 모델 데뷔 후 한 차례 페이스 리프트를 거쳤는데, 오래된 느낌이 별로 없다. 특히 빵빵한 뒷모습이 매력적이다.
파워 트레인은 1.5ℓ 90마력 디젤 엔진과 게트락의 DCT(듀얼 클러치 트랜스미션)를 조합했다. 그동안 판매된 QM3에 얹은 조합 그대로다.
시동 후 출발은 부드럽다. 기어가 변속될 때 충격이 전해지는 DCT의 단점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자동변속기와 유사한 변속 감각이 일품. 다만 킥다운을 시도하면 반응은 다소 느리다. 작은 차체에 비해 가속력은 괜찮은 편이지만, 폭발적인 수준은 아니다.
수동 모드를 활용하면 좀 낫다. 그러나 쉼 없이 변속을 해야 맘에 드는 가속력이 나온다. 코너가 이어지는 와인딩 로드에서는 변속을 하느라 손이 더 바빠진다. 패들 시프트가 아쉬운 순간이다.
최대토크는 딱 설정된 구간(1750~2500rpm)만큼 나온다. 그 이상의 고회전에서는 다소 힘이 부친다. 최고시속은 180㎞ 정도가 한계다.
정숙성은 평균 수준. 급가속 때는 엔진음이 다소 큰 편이지만, 정속 주행 때는 디젤차치고 꽤 조용해진다. 다만 이 때는 하부에서 소음이 좀 올라온다. 하부소음의 원인 중 하나가 '넥센 타이어'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국내에 들어오는 클리오에는 오로지 넥센 타이어만 장착된다.
발랄한 몸놀림은 그동안 보아오던 국산 소형차들과 많이 다르다. 착 달라붙는 수준의 핸들링은 아니지만 코너링에서 꽤 끈끈한 접지력으로 버틴다. 시승회에 참석한 데일리카 박홍준 기자는 “차가 꽤 재미있네요”라며 입맛을 다셨다. 동승한 류청희 칼럼니스트는 “에이, 좀 빨리 나오지”라며 한숨을 쉰다. 그는 클리오가 나오길 기다리다가 경차를 구매했다.
파워트레인이 평범한 것 같지만, 클리오는 RS 트로피까지 둘 만큼 고성능 버전을 감안해 설계한 차다. 문제는 클리오 RS나 RS 트로피 같은 고성능 버전은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전임 박동훈 사장은 한정판으로 들여올 거라 했었는데, 도미닉시뇨라 사장의 의중은 어떨지 모르겠다.
쏠쏠한 운전재미에 비해 실내는 다소 아쉽다. 특히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디테일한 요소에서 몇몇 단점들이 눈에 띈다.
우선 앞 시트의 등받이 각도 조절이 불편하다. 전동 시트를 제외하면 레버를 당긴 후 등받이 각도를 조절토록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인데, 클리오는 일부 유럽차들처럼 동그란 다이얼을 움직여서 각도를 조절해야 한다. 게다가 운전자는 시트에 달린 암레스트를 젖혀야 이 다이얼을 돌릴 수 있어 불편하다. 예전에 폭스바겐 골프, 제타, 폴로의 오너들은 차를 뽑은 후 전동 시트로 개조를 많이 했다. 다이얼 방식이 그만큼 불편하다는 얘기다.
컵홀더도 눈에 거슬린다. 설치된 컵홀더는 깊이가 낮아 용기가 안전하게 고정되지 않을뿐더러, 크기에 따라 조절되지도 않는다. 클리오를 구매한다면 컵홀더는 반드시 추가로 설치해야 할 것 같다.
뒷좌석 유리가 끝까지 내려가는, 이른바 ‘한상기(자동차 유튜버) 옵션’은 앞좌석을 주로 이용하는 이들에게 크게 아쉽진 않을 듯하다. 그보다는 선글라스 홀더가 없는 게 의아스럽다. 글러브 박스도 작고 센터콘솔도 없어 선글라스를 둘 곳이 마땅치 않다. 운전석 천장 손잡이가 자리하는 곳에 선글라스 홀더를 장착하면 훨씬 편할 듯하다.
유튜브에서 인기 높은 오토캐스트 이다정 기자는 트렁크 도어를 지적했다. 이 기자는 “트렁크 도어가 너무 뻑뻑하다”면서 “여자들이 닫으려면 힘이 많이 든다”고 했다.
연비는 아주 뛰어나다. 제원표에는 복합 17.7㎞/ℓ로 나와 있는데, 나는 시승회에서 급가속과 고속주행을 자주 시도했음에도 16.8㎞/ℓ를 찍었다. 연비 위주의 주행을 한다면 리터당 20㎞도 훌쩍 넘을 것 같다.
르노 클리오의 가격은 ‘젠(ZEN)’ 트림이 1990만원, ‘인텐스(INTENS)’는 2320만원이다. 인텐스에 추가 장착된 옵션은 LED 헤드램프와 3D 타입 LED 테일램프, LED 안개등, 전자동 에어컨, 가죽 스티어링 휠, 보스 사운드 시스템, 블루투스 핸즈프리, 전후방 경보 시스템 등 다양하다. 옵션 구성과 가격 차이로 볼 때 인텐스 트림의 가치가 더 크다.
다만 2320만원의 가격은 여러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국산차가 상당히 많기 때문. 르노삼성의 라인업에서는 SM6 2.0 GDe PE 트림이 2450만원으로 130만원 차이밖에 안 난다. SM5 2.0은 2150만원으로 가격이 더 싸고, 2220만~2495만원인 QM3도 비교 사정권에 있다.
방실 이사는 “프랑스 현지보다 1000만원 이상 싼 가격으로 들여온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국산 소형차와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다. 게다가 그는 “르노삼성이 들여온 것이 아니라 ‘르노’라는 별도 브랜드가 첫 상륙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실상 국산 경쟁차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경쟁차 푸조 208의 가격은 2590만~2790만원이고 최고출력은 99마력에 최대토크는 25.9㎏·m다. 출력과 토크 모두 클리오보다 높다. 휠은 16인치로 클리오보다 작지만, 브레이크가 앞 뒤 모두 디스크여서 뒤쪽이 드럼인 클리오와 차이가 있다. 또한 클리오는 앞 뒤, 사이드 등 4개의 에어백이 있지만, 푸조 208은 커튼 에어백까지 총 6개의 에어백이 장착된다. 푸조 208은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렇게 비교해보니 옵션이 꽤 알차다.
클리오는 소형차와 해치백의 무덤인 한국시장에서 ‘혁명(Revolution)’을 일으킬 수 있을까. 체면보다 실속을 따지는 소비자들이 클리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해줄지 궁금해진다.
평점(별 다섯 개 만점. ☆는 1/2)
익스테리어 ★★★★☆
인테리어 ★★★★
파워트레인 ★★★☆
서스펜션 ★★★★
정숙성 ★★★☆
운전재미 ★★★★
연비 ★★★★★
값 대비 가치 ★★★★
총평: 기존의 국산 소형차는 잊어라. 고성능 모델까지 들여오면 금상첨화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