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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사건 트라우마에서 파생된 대인관계 트라우마

발행일 : 2018-09-22 08:27:59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You Were Never Really Here)>에서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꾸는 청부업자 조(호아킨 피닉스 분)는 상원 의원의 딸 니나 보토(예카테리나 삼소노프 분)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소녀를 찾아내지만 납치 사건에 연루된 거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건 트라우마로 파생된 대인관계 트라우마까지 겪으면서 사는 고통스러운 삶, 비밀스러운 업무를 수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무생물인 장애물과 방해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내면의 선택을 호아킨 피닉스는 생생하고 실감 나게 표현한다. 예카테리나 삼소노프는 보호해야 할 연약한 대상이라기보다는, 호아킨 피닉스와 같은 정서를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 사건 트라우마와 대인관계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특정한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쇼크 트라우마(shock trauma), 사건 트라우마(incident trauma)’와 반복된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대인관계 트라우마(interpersonal trauma)’가 있다.
 
교통사고 등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 트라우마보다,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된 지속적인 관계성 속에서 발생하는 대인관계 트라우마가 더 위험하고 해결하기 어렵다. 사건 트라우마는 사건에서 빠져나오면 상대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대인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그래서 인간관계 트라우마가 있을 경우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지속적인 치유를 받아야 하지만, 사건 트라우마의 경우 한의원에 가서 빨리 침을 맞는 게 효과적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사건 트라우마는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사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그 사건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서 대인관계 트라우마까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실제 상황과 여러 영화 속 설정이 그러하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넌 더 잘해야 해”라는 말이 영화 초반에 반복되는데 어릴 적부터 강박을 심은 것이다. 두 가지 트라우마를 모두 치료해야 하는데 둘 다 그냥 둔 채로 살고 있는 조,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살아있는 유령 같은 인생에 조용히 조를 깨우는 목소리 “Wake up, Joe!”는 트라우마와 강박에 잡힌 조를 각성해 움직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 조는 납치된 니나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사물, 즉 무생물인 장애물과 방해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마치 죽는 연습을 하는 것 같은 조는 유명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뒷일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업무 대상으로 볼 것이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보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애물과 방해물을 치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조와 같은 내면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의식의 영역에서는 버틸 수 없기에 나를 스스로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무의식이 선택하는 것이다.
 
환자도 사람이라는 면을 생각하면 환자를 대할 때의 감정 조절을 감당할 수 없기에 의사가 환자를 사람이 아닌 병으로 대하고, 범인도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측은지심이 생겨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거나 죄를 제대로 응징할 수 없기에 경찰이나 법관이 범인을 사람이 아닌 죄로 대하는 것과 유사하다.
 
‘형사 피고인의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라는 ‘무죄 추정의 원칙’ 또한 사람이 기본적인 내면의 선택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선입견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 감정이 꽉 차 있지만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려는 듯한 표정연기를 펼친 호아킨 피닉스와 예카테리나 삼소노프
 
감정이 꽉 차 있지만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려는 연기는, 감정을 모두 표출하고 발산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연기이다. ‘철저하게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감정은 사치다’ 혹은 ‘아직 나는 너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감정이 충만한 감정 표출 억제 연기를 호아킨 피닉스와 예카테리나 삼소노프는 보여준다.
 
이는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은 내면과 강한 개인적 이슈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이슈는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꾼다는 것인데, 예카테리나 삼소노프는 그와 비슷한 표정 연기를 보여줘 그녀 또한 비슷한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게 만든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니나 보토 캐릭터가 조 캐릭터에게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두 인물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조가 니나를 납치한 것이 아니라 보호해 데려오는 과정이라는 것도 이런 뉘앙스에 더 가깝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이 인질범의 심리에 정신적으로 동화 혹은 동조하는 증세 또는 현상을 말한다.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만든 대상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비합리적인 증세 또는 현상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사진. 사진=콘텐츠게이트 제공>

니나는 조에게 구조돼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지만, 위험이 제거된 자유로운 상태가 아닌 도처에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 빠진다. 어쩌면 이런 상태에서 니나에게 조는 안전을 주고 보호를 해주는 대상이 아닌 위험의 대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위해 니나의 무의식은 조에게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와 예카테리나 삼소노프는 이런 두 사람의 내면을 얼굴 표정과 몸의 움직임으로 무척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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