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대학로 TOM(티오엠) 1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랭보>에서 베를렌느(에녹, 김종구, 정상윤 분)는 랭보(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 분)의 시인이자, 동료이자, 연인이자, 심리적 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
에녹은 목소리에 담긴 슬픈 감성으로 베를렌느의 억눌림, 억울함, 답답함,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실감 나게 대사와 노래로 표현했다. 에녹이 다른 배역을 맡았다면, 에녹의 랭보, 에녹의 들라에(이용규, 정휘, 강은일 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에녹의 목소리에 담긴 슬픈 감성
<랭보>에서 에녹은 목소리에 담긴 슬픈 감성을 노래와 대사로 절절하게 표현했다. 슬픔을 받기보다는 슬픔을 줬을 것 같은 표정을 가지고, 슬픔에 오랫동안 잠겨 있는 정서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억눌림, 억울함, 답답함,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때 더욱 인상적인 목소리는 뛰어난 가창력의 힘을 받아 무대를 장악했다. 베를렌느를 표현한 에녹의 연기를 보면, 베를렌느의 내면인지 에녹의 내면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에녹은 다른 배역에도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랭보 역할을 해도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에녹이 랭보를 맡았다면 베를렌느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더 평범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만약 에녹이 들라에 역을 맡았어도 훌륭했을 것이다. 관객은 에녹의 들라에를 마치 자기의 모습인 것처럼 감정이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공연을 볼 때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를 접하며 관객석에서 나의 평범함에 좌절하는 모습과 들라에의 모습을 심리적으로 오버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시인이자, 동료이자, 연인이자, 심리적 아버지
<랭보>에서 랭보와 베를렌느는 우정 이상의 깊은 교감과 향유를 한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가 남녀관계였다면 어땠을까? 두 사람이 공감과 교류 속에 더 생생하면서도 더 따뜻한 시가 나왔을 수도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영혼으로만 사랑했을까? 바닥에 각각 입맞춤을 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상징일 수도 비유일 수도 있다. 생활은 감각적인데 삶을 사는 태도는 진지한 베를렌느와 진지함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진지한 랭보는 다른 것 같지만 공통점이 많다. 소울 메이트라고 볼 수도 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랭보는 버림받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택받았고, 또한 저주받았네”라고 한다. 베를렌느를 대하는 랭보의 태도를 보면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베를렌느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반감을 베를렌느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랭보와 베를렌느 모두 행복하면서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현실과 두 사람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서로에게 투사해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 랭보에게 아프리카가 주는 의미는?
랭보에게 아프리카는 영감을 주는 장소이다. 영감을 찾고 싶은 장소라고 볼 수도 있다. 랭보에게 아프리카는 현실과 가장 떨어진 곳을 뜻한다고 추측된다. 만약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면 어릴 적부터 더 좋은 시를 썼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만약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면, 랭보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는 유럽이나 아시아였을 수도 있다.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바라본 장소가 랭보에게는 아프리카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랭보는 영감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찾아갔는데, 어떻게 보면 아프리카 뒤에 숨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소는, 현실에서 가장 먼, 상처의 기억에서 가장 먼 아프리카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