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TOM(티오엠) 1관에서 10월 23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공연 중인 뮤지컬 <랭보>에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심리학자 로날드 페어베언(W. Ronald D. Fairbairn)의 ‘분열성 양태(split position)’ 모델을 적용하면, 랭보(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 분)와 베를렌느(에녹, 김종구, 정상윤 분), 들라에(이용규, 정휘, 강은일 분)의 관계성을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랭보는 베를렌느에게 밀착하고 의지하고 모습을 보이다가, 베를렌느로부터 떨어져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랭보의 내면 심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성격으로 보일 수도 있다. 페어베언의 모델을 적용해 살펴보면, 랭보가 얼마나 내적 갈등이 많았는지 공감하게 돼 마음이 아프다.
◇ 로날드 페어베언의 리비도적 자아/흥분시키는 대상, 반리비도적 자아/거부의 대상
삶의 목적은 본능의 충족이 아니라 관계라고 페어베언은 말했다. 로날드 페어베언 분열성 양태 모델의 핵심은 리비도적 자아/흥분시키는 대상, 반리비도적 자아/거부의 대상이다. 용어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데,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쾌락 추구였다면, 페어베언에게 리비도는 대상 추구라는 점이 중요하다.
분열성 양태 모델에서 완전한 고유의 자아는 본래 고유의 대상인 다른 사람과 완전하고 문제없는 관계를 리비도적 연결로 형성한다고 전제한다. 대상과의 완벽한 리비도적 연결이 침해받을 경우,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아와 대상을 각각 견딜 수 있는 부분과 견딜 수 없는 부분으로 나눈다.
자아는 스스로 견딜 수 있는 부분인 ‘리비도적 자아’와 견디기 힘든 부분인 ‘반리비도적 자아’로 분리되는데, 이는 각각 대상이 되는 타인의 부분인 ‘흥분시키는 대상’과 ‘거부의 대상’과 연결된다.
즉, 강하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나의 부분인 ‘리비도적 자아’는 나를 애타고 감질나게 만드는 타인의 부분인 ‘흥분시키는 대상’과 연결된다. 의존적인 나에 대한 혐오와 거부 또한 같이 형성되는데 나의 부분인 ‘반리비도적 자아’가 돼 상대방을 ‘거부의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이때 사용되는 리비도는 쾌락 추구가 아닌 대상 추구이다.
나와 리비도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고, 상대방과 흥분시키는 대상, 거부의 대상이 모두 다른 사람인지 같은 사람의 다른 면인지 궁금해질 수도 있다.
리비도적 자아와 반리비도적 자아는 모두 나이자, 내 안에 있는 나의 일부분이다. 흥분시키는 대상과 거부의 대상 역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 사람 내면에 있는 다른 면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원래의 자아와 대상이 나눠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같은 결국 같은 사람의 다른 면인 것이다.
◇ 베를렌느에 대한, 랭보의 리비도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랭보는 버림받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한다. 랭보의 이런 경험과 생각은, 베를렌느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랭보는 버림받는 것에 대해 강한 이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베를렌느는 랭보의 시를 이해하고 랭보의 생각을 꿰뚫는 유일한 인물이다. 처음에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완전한 고유의 자아’인 자신을 알아주는 ‘고유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 이상 완벽한 관계가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멀어지지도 않는, 중간 단계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랭보는 베를렌느를 믿고 의지한다. 자신의 시에 대해 베를렌느가 인정과 반영해주기를 바란다. 정신적인 면 이외에도 경제적으로도 의존한다. 랭보와 베를렌느가 돈을 하나도 벌지 않을 때, 그들의 생활을 유지한 것은 오롯이 베를렌느가 이전에 벌어둔 돈이었다.
랭보의 ‘리비도적 자아’는 베를렌느의 ‘흥분시키는 대상’에 의존한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한계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는, 랭보가 하자는 대로 베를렌느는 다 받아주는데 이런 부분은 랭보를 애타게 만든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심리적인 어려움을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전달하면서, 랭보는 전적으로 베를렌느에게 의존하고 있던 자신에 대해 혐오감과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랭보의 ‘반리비도적 자아’는 베를렌느를 ‘거부의 대상’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랭보에게는 베를렌느가 아버지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특히, 본인을 훈계하려 하고 떠나려고 했을 때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랭보의 ‘반리비도적 자아’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과거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현재의 베를렌느에게 투사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시에 대한, 랭보의 리비도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
랭보가 하는 대화를 들으면 랭보는 시를 인격화하고 의인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에 대해서도 랭보는 ‘리비도적 자아’와 ‘반리비도적 자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시는 가짜고 낭만적인 거짓말이다.”라는 대사는 시에 대한 ‘반리비도적 자아’를 표출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랭보가 시에 대해 ‘반리비도적 자아’를 드러낸다는 것은. 시를 ‘거부의 대상’으로 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베를렌느와 절대 헤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랭보가 베를렌느와 헤어지고, 시를 쓰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랭보가 절필을 하게 된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이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은 되는데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관객들이 있다.
랭보의 행동에만 집중하지 말고 내면 심리에 초점을 맞추면 랭보의 선택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를렌느와 시를 각각 ‘거부의 대상’으로 대했던 랭보의 ‘반리비도적 자아’ 때문에 랭보는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랭보의 고통과 아픔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랭보의 마음을 이해하면 천재시인도 우리와 같은 고통과 아픔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