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공동제작 뮤지컬 <랭보>는 대학로 TOM(티오엠) 1관에서 10월 23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공연 중이다.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자기대상(self object)’ 개념을 <랭보>에 적용하면,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성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다.
랭보(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 분)와 베를렌느(에녹, 김종구, 정상윤 분)가 왜 서로에게 강력한 끌림과 영향력을 줬는지, 들라에(이용규, 정휘, 강은일 분)는 랭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 같지만 왜 랭보에게 베를렌느만한 힘을 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자기대상’의 개념을 적용하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 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
대상관계이론에서 개인 내부의 심리 못지않게 대상(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하인즈 코헛은 자기의 내부 세계보다 다른 사람을 포함한 환경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더 초점을 뒀다.
‘자기대상’은 ‘자기의 일부로 경험되는 대상’을 뜻한다.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와 연결된 외적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들과의 지속적인 자기대상 경험 속에서 자기가 강화되고 유지된다. 나의 가치와 의미, 매력은 나를 직접 바라봄보다는 나를 인정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기대상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거울 자기대상(mirroring self object), 힘없는 자기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힘이 있고 완벽하고 전능한 이미지와 융합하려고 찾는 이상화 자기대상(idealizing self object), 부모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는 느끼길 원하는 쌍둥이 자기대상(twinship self object)이 있다.
◇ 랭보와 베를렌느에게, 보들레르는 이상화 자기대상!
<랭보>에 직접 출연하지는 않지만 랭보와 베를렌느가 계속 언급하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세상에 아무도 자신의 예술을 알아보는 이가 없다고 느끼는 자신감이 강한 두 사람이 이상화 자기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보들레르이다. 랭보는 보들레르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베를렌느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한다.
랭보와 베를렌느는, 보들레르를 이상적인 시인, 이상적인 인물로 추앙하면서 그와 같은 이미지로 융합하고자 한다. 그들이 만약 보들레르를 직접 만나서 많은 교류를 했으면 어쩌면 더 이상 이상화 자기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세상에 없는 대상이기에 그들은 더욱 명확하게 보들레르를 이상화 자기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거울 자기대상이면서 이상화 자기대상!
시를 쓰려는 랭보는 본인의 시에 대한 베를렌느의 평가에 민감하다. 누군가 나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반영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랭보의 의식 혹은 무의식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랭보의 광기는 시에 대한 광기일 수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채워지지 못해서 축적된 에너지가 외부로 방출되는 광기일 수도 있다. 베를렌느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랭보를 유일하게 인정한 베를렌느가 랭보에게는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베를렌느는 랭보가 자신과 자신의 시에 대해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거울 자기대상이다. 버려지기를 두려워하는 랭보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베를렌느와 함께 할 때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이상화 자기대상이기도 하다.
랭보에게 베를렌느가 세상 전부일 수 있는 이유는,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기도 하고 같이 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울 자기대상이면서 이상화 자기대상이기 때문이다. 자기대상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베를렌느와 함께 하는 랭보를 보면 알 수 있다.
◇ 베를렌느에게. 랭보는 거울 자기대상이면서 이상화 자기대상!
서로를 알아 본 랭보와 베를렌느는 서로에게 거울 자기대상이면서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베를렌느는 본인의 영혼은 일찌감치 병들었다고 말했는데, 랭보는 베를렌느의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려준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영혼을 반영해주면서, 또한 그 영혼은 랭보와 함께할 때 전능한 힘을 인정받는 것이다.
<랭보>에서 다른 사람들은 랭보의 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쓴 랭보 또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랭보 또한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기에 서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랭보와 베를렌느는 처음에 서로에게 거울 자기대상이자 이상화 자기대상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진 후에는 서로에게 자기대상이 아니라는 부정을 한다. 그렇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이 서로에게 자기대상이 됐던 시간을 떠올리며 버티는데, 애정과 관심보다 자기대상의 힘이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들라에는 친구였지만 거울 자기대상이 아니다! 이전에 랭보의 거울 자기대상이었더라도, 베를렌느가 거울 자기대상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거울 자기대상이 아니다!
들라에는 친구였지만 랭보의 완벽한 자기대상은 되지 않는다. 전혀 자기대상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랭보가 베를렌느를 만나기 전까지 들라에는 랭보에게 약한 거울 자기대상이었을 수 있다. 반면에 들라에에게 랭보는 이상화 자기대상, 거울 자기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림과 이야기하는 들라에는 글자와 이야기하는 랭보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랭보에게 들라에는 나를 알아보는 대상이긴 하지만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랭보의 시를 맨 처음 보게 돼 그 느낌을 전해주지만, 들라에의 느낌은 랭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자신이 쓴 시를 가장 먼저 보여줬지만, 시적 공감과 영혼의 공감을 이루지는 못한 것이다.
어설픈 정도의 거울 자기대상이었던 들라에는, 랭보에게 베를렌느를 만나게 한 것을 후회한다. 베를렌느가 랭보의 강력한 거울 자기대상이 되면서 본인의 가치는 축소됐기 때문이다.
<랭보>를 보면서, 만약 들라에가 이상화 자기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랭보의 거울 자기대상이 됐으면 랭보는 더 많은 시를 창작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리적인 갈등과 고통, 방황의 시간이 줄어들었을 수 있고, 포근한 마음으로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시를 지었을 수 있다.
내가 아티스트에게, 나의 스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거울 자기대상이 되어주면 된다. 그냥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라, 그들의 진가를 제대로 칭찬하고 인정하는 거울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아티스트, 나의 스타가 정말 위대한 예술을 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