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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영화] ‘선희와 슬기’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선희

발행일 : 2019-03-13 12:47:10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Second Life)>에서 18살 선희(정다은 분)는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러나 작은 거짓말은 친구 정미(박수연 분)의 자살을 부르게 되고, 선희는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난 선희는 모범생 슬기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다.
 
선희는 죄책감에 벗어나기 위해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에 걸린다. 선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야 하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리플리 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있는데, 자존감이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엄청 많기 때문이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 리플리 증후군이란?
 
리플리 증후군은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에서 유래된 말로,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리플리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자신보다 매력적이고 좋아 보이는 대상으로 살기를 바라며 그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어야 리플리 증후군이다. 거짓말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는 다르다. 내가 하는 거짓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말할 때 확신이 있고, 사람들은 리플리 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말을 처음에 믿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재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일 때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선희! 선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야 할까?
 
리플리 증후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선희와 슬기>에서 선희는 일반적인 리플리 증후군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버리고 현존하는 다른 사람이 돼 그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슬기라는 가상 인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그 삶을 질투해 그 사람이 되려고 한 게 아니라, 선희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플리 증후군에 걸렸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Second Life’인데,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두 번째 삶’이라는 점을 감독이 전달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도 선희 자신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살고 싶었을까? 방울(정유연 분)과 원장쌤(전국향 분)은 선희를 처음부터 슬기로 대하는데, 다른 사람이 슬기를 대하듯 그 이전에 알던 사람들이 선희를 존중했으면, 선희는 선희로 그냥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거짓말을 했을 때 그 거짓말로 인해 되돌아오는 보상이 있다. 선희는 사촌 오빠가 기획사에 있어서 매진된 콘서트 표를 구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연대 다니는 남친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선희는 작은 거짓말이 주는 달콤한 보상에 거짓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선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았더라면, 그럴 정도로 선희가 내적 자신감을 가졌더라면, 선희는 거짓말을 했을까? 선희는 그냥 자신이 싫어서 슬기가 된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시도한 후 슬기로 살기로 결정했다. 선희가 잘했다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정말 살고 싶어서 슬기가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리플리 증후군에 걸릴 위험성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리플리 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있다. 자존감이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엄청 많기 때문이다.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 스틸사진.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

<선희와 슬기>에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방울은 “신기한 게 있지 않나? 남의 사진을 찍어도 이상하게 내가 보인다.”라고 말한다.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사람을 보면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어쩌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잠재적 리플리 증후군을 무의식적으로 경계하거나 위로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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