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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뮤지컬] ‘시데레우스’ 커튼콜에 관객은 별이 된다! 갈릴레오에게 보낸 케플러의 편지에서 시작된 이야기!

발행일 : 2019-04-23 10:16:07

충무아트센터 주최, 주식회사 랑 제작, 백승우 극작/작사, 이유정 작곡/작사, 김동연 연출, 창작뮤지컬 <시데레우스>가 4월 17일부터 6월 30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 중이다.
 
갈릴레오(고영빈, 정민, 박민성 분)에게 보낸 케플러(신성민, 정욱진, 신주협 분)의 편지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갈릴레오의 딸인 수녀 마리아(김보정, 나하나 분)는 지동설 연구의 위험과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시대의 혼란, 두 가지를 모두 대변한다.

‘시데레우스’ 공연사진.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공연사진.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 ‘별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아닌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오가 저술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책의 제목에서 따온 작품이다. 제목은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별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정복자의 마음보다는, 진실을 알고 싶고 알리고 싶다는 겸손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데레우스>가 공연되는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은 우주와 연구실이 교차하는 공간 느낌으로 꾸며졌다. 무대 첫 번째 열 앞의 촛불은 예전 이야기라는 느낌과 함께, 하나의 별 또한 하나의 촛불처럼 빛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데레우스’ 공연사진.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공연사진.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무대에는 케플러의 공간과 갈릴레오의 공간이 대비와 균형을 이룬다. 둘이 공유하는 하나의 창은 우주일 수도 있고, 진리의 영역일 수도 있다. <시데레우스>에는 세 명이 등장하는데 마리아의 공간은 별도로 주어지지 않는다.
 
“마리아! 갈릴레오의 이단 행위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와 “마리아! 교황청은 당신의 답변을 기다립니다.”라고 계속 반복되는 내레이션에 대해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갈릴레오의 공간과 공유한 공간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시데레우스’ 신성민(케플러 역), 고영빈(갈릴레오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신성민(케플러 역), 고영빈(갈릴레오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 진리는 영원한가? 갈릴레오를 전사가 아닌 과학자로 기억되도록 만든 일화!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오를 전사가 아닌 과학자로 기억되도록 만든 일화를 담고 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끝까지 주장했으면 더욱 강직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도 있었겠지만, 마지막에 굴복함으로써 전사가 아닌 과학자로 기억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비록 비겁하게 기억되고 있긴 하지만 그 상황에서 끝까지 지동설을 주장했더라도 역사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택의 비겁함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선택의 현실성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데레우스’ 정민(갈릴레오 역), 정욱진(케플러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정민(갈릴레오 역), 정욱진(케플러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는 세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질문들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바꾸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케플러는 가설과 근거 없는 상상의 가치를 설파하며,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데레우스>를 보면 케플러는 틀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로 보면 안 되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케플러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한때는 신성 모독하는 발칙한 가설이었고, 그 가설을 부정하도록 강요된 진실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타당한 선택이었냐에 대해서는, 현재의 시점에서 봤을 때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시데레우스’ 박민성(갈릴레오 역), 신주협(케플러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박민성(갈릴레오 역), 신주협(케플러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는 ‘진리는 영원한가?’에 대한 화두를 계속 던진다. 케플러는 측정해서 얻는 진리를 더욱 믿고, 갈릴레오는 이론에 의해 예상해서 계산된 진리를 더욱 신봉한다.
 
천문학과 수학에 모두 통달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갈릴레오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고 케플러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서로 다른 전공,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천체를 계속 볼 수 있는 집요함은 공통점이다.

‘시데레우스’ 김보정(마리아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김보정(마리아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서로 다른 시야가 시너지를 낼 때의 힘을 <시데레우스>는 보여주는데, 선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갈릴레오와 선을 넘는 것에 두려움이 적은 케플러가 서로를 존중할 때 어떤 성과를 냈는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 자신의 업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케플러에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보다는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람들이 케플러와 케플러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면 더 위대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시데레우스>는 숨겨진 진실이 지동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뮤지컬이다. 케플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기억하는 갈릴레오도 지동설도 없었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케플러가 <시데레우스>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시데레우스’ 나하나(마리아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시데레우스’ 나하나(마리아 역). 사진=충무아트센터 제공>

◇ 커튼콜에서 관객은 별이 된다! 팩트에 대해 질주하던 이야기는, 정서적인 여운을 강하게 남기며 마무리한다
 
관객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 커튼콜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반원형의 공연장 자체가 우주를 연상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야기는 정서적인 면보다 팩트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는데, 마지막에 정서적인 면을 극대화한 것이다.
 
<시데레우스>는 가볍고 편하게 볼 수도, 가치관과 진실의 갈등에 감정이입해 많은 것을 생각하며 볼 수도 있는 작품이다. 갈릴레오와 관련된 뮤지컬을 관람하지 않아도 볼 수 있고, 관람했을 경우 다양한 시야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초연 공연이자 신진 창작자의 작품이라는 점은 <시데레우스>의 기대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 재공연을 통해 계속 진화하는 뮤지컬과 제작진이 되기를 응원한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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