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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연극] ‘미저리’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애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무섭게 생기지 않아서 더 무섭고 섬뜩한 김성령!

발행일 : 2019-07-15 11:50:44

윌리엄 골드먼 작(원작 : 스티븐 킹), 황인뢰 연출, 연극 <미저리(MISERY)>가 7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중이다. ‘집착의 그녀가 돌아왔다’라는 부제를 가진 이번 작품은, 소설과 영화를 거쳐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애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애니는 병적인 집착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애니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절대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괴로운 내면세계에서 산 애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살펴줄 필요는 있다. 김성령은 무섭게 생기지 않아서 더 무섭고 섬뜩하게 느껴지는데, 순간 훅 들어가는 연기에 관객은 멈칫하거나 감탄할 수 있다.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애니 역 김성령).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애니 역 김성령).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 내 안의 또 다른 자아
 
<미저리>에는 세 명이 등장한다. ‘미저리’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 시리즈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김상중, 안재욱 분)과 ‘미저리’ 시리즈의 애독자로 ‘폴’에게 광적인 집착을 드러내는 여자 ‘애니 윌크스’(길해연, 김성령 분), 그리고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폴’의 행방을 찾는 실버 크릭의 보안관 ‘버스터’(고인배, 손정은 분)이다.
 
연극 초반 대사에는 ‘우상’, ‘No.1’, ‘현재’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내가 현재를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 현재의 나를 주입해 감정이입하게 만든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미저리>에서 애니가 가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무서운 집착을 만들고, 폴은 ‘내 안의 또 다른 작가’를 꿈꾼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같지는 않지만 애니와 비슷한 면이 있다. 폴은 좀 더 진지한 작품을 쓰고 싶기 때문에 또 다른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돼지에게 미저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돼지와 이야기하는 애니의 모습을 보면, ‘또 다른 자아’는 정신분열을 떠오르게 만든다. 애니는 욕을 하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 같은 거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데, 자신이 만든 세계, 욕을 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가 흠짓이 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강박 또한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미저리>에서 애니는 이야기의 점핑, 감정의 점핑을 극도로 싫어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감정의 점핑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만 애니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분리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리적 노력일 수 있다.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애니 역 길해연).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애니 역 길해연).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관객은 애니가 생각하는 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니는 자신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세계가 정의롭다고 여긴다. 그 정의로운 세계에 애니와 애니가 감정이입한 미저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저리는 애니의 표상일 수 있다. 미저리를 죽인다는 것은 미저리에 과하게 몰입해 감정이입해 자신과 동일시하며 사는 애니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뜻한다. 소설 속에서 미저리가 죽은 것을 알게 된 후 자신이 더욱 미저리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 폴에 대해 가지는, 애니의 두 가지 억울함
 
<미저리>에서 애니를 얼핏 보면 집착과 광기를 가진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애니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애니는 폴에 대해 두 가지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의 애독자이자 폴의 팬인 애니는 그동안 소설의 내용과 함께 폴을 믿고 의지했었다. 그렇지만 폴은 최근 작품에서 미저리를 죽였는데, 애니는 믿었던 만큼 배신당했다는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애니 혼자 그렇게 상상하고 생각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어쨌든 애니는 스스로 억울했을 것이다.
 
애니는 폴을 납치(?) 및 감금(!)한다. 관객은 다리를 크게 다쳐 움직일 수 없는 폴을 애니가 가두고 있다고 봤을 것인데, 애니는 다르게 생각한다. 폴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면서 24시간 돌봐줬는데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폴 역 김상중).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폴 역 김상중).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미저리>를 보면 애니의 이야기를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유일하게 위로받았다고 생각했던 소설의 저자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선택한 행동과 모습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과정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애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다면 애니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애니의 행동이 절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저렇게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 편하게 마냥 애니를 미워하기는 쉽지 않다.
 
◇ 변형 회전 무대가 주는 긴장감, 긴박감, 속도감
 
<미저리>는 한정된 공간에서 주로 정적으로 진행되지만, 변형 회전 무대가 주는 긴장감, 긴박감, 속도감은 감정을 휘몰아치게 만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폴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할 때의 긴박감에 관객은 같이 마음을 졸이게 될 수 있다.
 
무대 회전은 영화에서 카메라가 회전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편집이 없이 라이브로 진행되는 무대 회전이 주는 긴장감은 실제 무대가 회전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만드는데, 무대 회전을 심리적으로 밀착시킨 연출은 놀랍다.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폴 역 안재욱).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미저리’ 캐릭터 포스터(폴 역 안재욱). 사진=크리에이티브리더스그룹에이트 제공>

◇ 무섭게 생기지 않아서 더 무섭고 섬뜩한 김성령! 김성령의 진지한 코믹 연기!
 
<미저리>에서 김성령은 무섭게 생기지 않아서 더 무섭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원하는 애니를 실감 나게 표현하는데, 김성령이 굵은 연기로 강력한 카리스마의 연기를 펼쳤다면 관객은 처음부터 강하고 무서운 사람만이 애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김성령의 애니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 또한 애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 더욱 무섭게 느껴지게 한다. 김성령의 순간 훅 들어가는 연기는, 상상도 못 했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관객이 순식간에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미저리> 커튼콜에서 안재욱과 김성령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성령은 먼저 안재욱을 주인공으로 대접해 안재욱을 기준으로 인사하게 유도했고, 안재욱은 다시 김성령 기준으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과하게 몰입해 감정이입한 관객은 커튼콜에서 안재욱과 김성령을 보면서 계속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는데, 안재욱과 김성령이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모습은 과몰입한 관객이 극에서 빠져나오는데 도움을 준다. 서로에 대해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이제는 연극이 끝난 현실 세계라는 것을 각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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