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글이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로부터 ‘AMG 드라이빙 아카데미’에 초대 받았을 때 문득 이 글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젊은 날의 질주 본능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참가 신청을 받으면서 서킷 주행 경력을 물어봤다. 비슷한 실력자들을 같은 그룹으로 모으기 위한 것 같았다.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부터 영암 F1 서킷, 인제스피디움, 중국 주하이 서킷, 말레이시아 세팡 서킷 등에서 달렸던 기억을 떠올려봤는데, 정확한 횟수는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100회 이상’이라고 적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300회’라고 적은 기자도 있다고 한다.
행사가 열린 AMG 스피드웨이에 도착하자 꾸물거리는 먹구름 아래로 빗방울이 살짝 떨어진다. 예감이 불안했다. 이러다가 제대로 달려보지도 못하는 건 아닐까.
내가 속한 조는 김태영 에스콰이어 에디터와 나윤석 칼럼니스트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 집결한 ‘그룹 1’이었다. 이 두 사람은 앞서 열린 타 브랜드 시승회의 짐카나 경주 1, 2위를 나눠가졌다.
‘세이프티 퍼스트 프로그램’ 중 우리 조가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드래그 레이스였다. 출발선에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선 후, 전광판 출발신호가 떨어지면 동시에 가속해 누가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는가를 가리는 게 드래그 레이스다. 첫 판부터 드래그 레이스라니,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나에게는 AMG GT S가 있었다. 이날 등장한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모델이다. 상대는 CLA 45 4매틱이니, 마음이 편안했다. 헌데 웬걸, AMG GT S가 뒤졌다. 출발 직전에 인스트럭터가 알려준 런치 컨트롤을 조작하다 일어난 일이다.
AMG GT S는 브레이크를 밟고 양쪽 패들 시프트를 당긴 후, 오른쪽 패들 시프트를 한 번 당기면 런치 컨트롤 모드로 진입한다. 이 기능을 작동하면 일반적인 출발보다 훨씬 강력하고 빠른 출발이 이뤄진다.
문제는 대기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이다. 런치 컨트롤 모드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몇 초만에 바로 풀려버린다. 포르쉐의 런치 컨트롤 모드는 이보다 더 길게 작동했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좀 아쉽다.
사실 AMG GT S는 CLA 45를 상대할 때 굳이 런치 컨트롤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 68.5㎏·m의 최대토크를 지닌 AMG GT S가 48.4㎏·m의 CLA 45보다 뒤질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 다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곧바로 드라이버 체인지가 이뤄지며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번 행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원선회 드리프트’다. 이는 구조물을 가운데 두고 가속하는 차의 스티어링과 가속 페달 조절을 익히는 것으로, 숙련자들은 한 자리에서 계속 드리프트를 하기도 한다. AMG 드라이빙 아카데미가 등장하기 전에는 BMW 드라이빙 센터의 교육 프로그램 정도에서만 다룰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나는 일부 기자들처럼 평소 시승차로 드리프트 연습을 하지 않았던 탓에 차가 자꾸 팽이처럼 돌았다. 서서히 가속한 후 차가 돌기 시작할 때 스티어링을 반대로 조작해야 하는데, 가속 페달을 너무 세게 밟으니 차가 빙그르르 돌아버린 것이다. 몇몇 실력자들은 아주 능숙한 원선회 드리프트를 보여주기도 했다. 역시 ‘죽음의 조’ 다웠다.
‘퍼포먼스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오후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트랙을 달렸다. ‘리드&팔로우’ 코너에서는 선도차가 이끄는 라인대로 따라가며 서킷을 공략했다. 정의철 인스트럭터는 운전자의 실력을 체크한 후 조금 뒤처지는 차를 바로 뒤에 붙여 1:1로 지도해줬다.
AMG GT S는 노즈가 긴 차체 때문에 급격한 스티어링 조작 때 간혹 컨트롤이 힘들어질 때가 있다. 행사 차량에 장착된 한국타이어 벤투스 RS-3는 승차감이 훌륭하지만 다소 소프트한 타입이다. AMG GT S와 RS-3의 조합은 서킷보다는 로드 투어에 더 적합해 보인다.
행사가 막바지로 달려가면서 ‘오토-X’를 맞닥뜨렸다. 흔히 말하는 짐카나 경주다. 이번 코스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세 번의 연습을 하니 정의철 인스트럭터가 “지금까지 가장 빠르다”고 알려준다. 갑자기 자신감이 치솟았다. 그러나 단 한 번 주어진 실전에서는 그만큼 달리지 못했다.
이어진 택시 드라이빙에서 인스트럭터가 모는 AMG GT S에 올랐다. 이제야 진짜 무대를 만났다는 듯, AMG GT S는 미친 듯 꿈틀댔다. 스피드웨이의 급격한 코너를 공략하며 타이어 연기를 내뿜는 모습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루 종일 타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동차에 관한한 '열정'은, AMG를 타고 즐기는 자와 아직 AMG를 체험해보지 못한 자로 얘기할 수도 있겠다. AMG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느낌, 바로 이 느낌을 AMG 드라이빙 아카데미에서는 마음껏 맛볼 수 있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