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부터 18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가 공연 중이다.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commitment therapy, ACT)’의 ‘수용(Acceptance)’과 ‘전념(Commitment)’, ‘개념화된 자기(conceptualized self)’와 ‘맥락으로서의 자기(self as context)’의 개념을 통해, 투란도트 공주(소프라노 이윤정, 이다미 분)가 왜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그토록 고수하는지, 칼라프 왕자(테너 이정환, 한윤석 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투란도트의 마음을 얻는지 살펴본다.
◇ ‘수용전념치료(ACT)’ 개념화된 자기 vs. 맥락으로서의 자기
심리치료 방법 중 수용전념치료는 수용과 전념을 강조한다. 수용전념치료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그 자체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데, 문제를 없애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문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한다. 수용전념치료는 심리적 고통(Pain)을 회피하거나 통제하려고 하면서 더 큰 괴로움(Suffering)을 겪게 된다고 본다.
개념화된 자기는 사회화 훈련과정의 결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야기를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자기를 의미하고, 맥락으로서의 자기는 사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맥락을 지켜보고 지금-여기의 경험을 조망하는 자기를 뜻한다.
‘나는 공주이다’, ‘나는 어떤 남자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낸다’라는 개념화된 자기는 ‘나’를 ‘공주’, ‘어떤 남자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내는 사람’에 융합해 나의 정체성을 ‘나=공주’, ‘나=어떤 남자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내는 사람’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개념화된 자기는 ‘직업적인 나’, ‘관계성 속에서의 나’, ‘심리적인 나’ 등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개념화된 자기가 과거의 나를 결정하는데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나를 결정해버린다는 것이다. 나와 개념화된 자기가 융합됐기 때문인데, 탈융합되기 전까지는 개념화된 자기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어떤 누구에 대해서 수용하지도, 전념하지도 못하는 투란도트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 공주는 어떤 남자도 자신이 낸 문제를 풀 수 없고,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가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확신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어떤 누구도 수용하지도, 전념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세상에 대해 수용하지도, 전념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투란도트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궁금해질 수 있는데, 자신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공주로서의 지위는 인정받지만, 개인 자체로 인정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며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고 추정된다.
오페라 속에서 생략된 것일 수도 있지만, 투란도트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투란도트의 미모를 흠모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경외감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칼라프는 투란도트에 대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칼라프가 문제를 푼 다음에 투란도트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데, 칼라프는 투란도트의 반응을 일단 수용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투란도트의 개념화된 자기, 맥락으로서의 자기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 공주는 ‘어떤 남자도 감히 접근해서는 안 되는 공주’, ‘누구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낸 사람’이라는 개념화된 자기를 가지고 있는데, 개념화된 자기를 믿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걸고 추종하고 방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칼라프는 투란도트가 낸 문제를 푼다. 문제를 푼 사람이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적용하면, 이제 투란도트는 ‘칼라프와 결혼해야 하는 공주’, ‘칼라프가 정답을 맞힌 문제를 낸 사람’이라는 맥락으로서의 자기가 된다. 그렇지만 투란도트는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반발한다.
투란도트는 강하게 말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는데, 수용전념치료의 시야로 보면 맥락으로서의 자기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던 개념화된 자기에 매몰돼 있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칼라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투란도트를 비난하며 몰아붙이기보다는, 역제안을 하나 함으로써 투란도트에게 하루의 시간을 준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