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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영화] ‘성혜의 나라’ 사건 자체가 강렬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발행일 : 2020-01-24 11:53:05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는 공시생 남자 친구 승환(강두 분)과 반지하 월세살이 취준생인 스물아홉 살 성혜(송지인 분)가 뜻밖의 일로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흑백 영화이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이다.
 
흑백 영화로 표현해, 사건보다는 사람에, 상황보다는 정서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 작품이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건 자체가 강렬해도, 그 삶 속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5억이 생긴다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영화는 던지는데, 관객은 성혜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 흑백 영화로 표현해, 사건보다는 사람에, 상황보다는 정서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성혜의 나라>는 흑백 영화이다. 칼라가 아닌 흑백을 통해 등장인물의 삶의 색깔을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주변의 색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핵심에 집중하길 바라는 감독의 선택일 수도 있다.
 
취준생의 삶과 5억이 생긴 이후의 삶을 모두 흑백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변화와 차이를 너무 감각적으로 보이지는 않게 연결해 완충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성혜의 나라>에서 흑백은 관객이 사건보다는 사람에, 상황보다는 정서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건 자체가 강렬해도, 그 삶 속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성혜의 나라>에서 신문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성혜는, 육체적으로만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도 편하지 않은 인물이다. 딱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 청춘들의 대표적인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불면증은 심리적 요인이라는 것을 영화는 강조한다. 제대로 잠을 못 잔다는 것은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성혜가 느끼는 오늘의 피로는 오늘만의 피로가 아니라 오늘까지 누적된 피로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관객은 그 피로가 내일도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공황장애가 일종의 불안장애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불행, 언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현실, 반복되는 삶에서의 무기력함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불행을 강렬하게 표현할 에너지도 부족하게 지쳐있고 무기력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속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을 수 있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영화도 반전이 바로 일어나지 않는데, 지루한 기다림이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실제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대로 그냥 끝까지 가는 것인가 생각할 때쯤 반전이 일어나는데, 기다릴 마음의 여운이 없는 관객은 감동을 느껴야 할 시간에 벌써 지쳐있을 수도 있다.
 
◇ 나에게 5억이 생긴다면? 나의 마음과 삶은 달라질 수 있을까? 달라진다면 어떤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성혜의 나라>는 가진 자가 되었을 때,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전보다는 훨씬 많은 가짐이지만, 진짜 가진 자에 비할 수는 없을 정도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관객이 생각하게 만든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참고 있었던 것을 더 이상은 참지 않고 표출할 수도 있고, 그전에 눈꼴시려도 억지로 참았던 것들을 좀 더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하던 갑질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감독은 이런 경우를 시각화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상황이 바뀐 지금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성혜의 마음은 정말 솔직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의 바람과 욕망은 구체적으로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힘든 현실에서 스스로 희망을 가지기 위해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운으로 남는다. 영화제의 관객과 일반 상영에서의 관객이 느끼는 감동과 반응이 같을지 아니면 다른 결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성혜의 나라’ 스틸사진. 사진=닷팩토리, 아이 엠(eye m) 제공>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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