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 작, 오세곤 번역, 기국서 연출, 극단76 제작, <엔드게임>이 9월 1일부터 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무대에서의 움직임은 처음으로 돌아오지만, 이야기와 감정을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성장 이야기, 더 이상 선택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성장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큰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굵은 움직임으로 박윤석은 무대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기주봉의 웃음 코드는 순간적이면서도 감각적인데, 신체를 분리하는 연기를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고, 신체의 각 부위에 서로 이질적인 설정을 한 복합적인 연기를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 처음으로 되돌아오지만, 이야기와 감정을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성장 이야기! 더 이상 선택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성장 이야기!
<엔드게임>은 무대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는 연극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처음의 위치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입체적으로 보면 그렇지 아니하다. 같은 장소로 돌아와 있는 것 같지만 이야기와 감정을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성장 이야기로, 더 이상 선택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성장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공연은 관객이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관객이 있는 공간에 배우들이 나와서 삶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공간에 관객들이 들어가는 느낌일 수도 있다.
관객은 얼굴이 보이는 배우와 보이지 않는 배우가 같이 있다는 것을 알며 이야기를 먼저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오래 보이지 않는 배우의 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엔드게임>에는 철학자 햄(기주봉 분), 클로브(박윤석 분), 나그(정재진 분), 넬(임지수 분)이 등장한다. 그중 셋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셋 중 두 인물은 관객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두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정재진과 임지수는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해야 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만, 배역 또는 배우에 감정이입한 관객은 투명인간 같은 존재감에 정말 많은 것을 느끼며 공감할 수도 있다.
◇ 굵은 움직임으로 무대에 역동감을 불어넣는 박윤석!
<엔드게임>을 보면 박윤석은 베케트의 움직임을 잘 이해하는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박윤석의 움직임은 정적일 수 있는 무대를 무척 동적으로 느끼게 만드는데, 큰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굵은 움직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클로브가 햄의 지시를 받기는 하지만 햄보다 여러 면에서 더 큰 사람일 수 있다는 이미지와 함께, 마치 체격이 큰 동물 같은 느낌을 전달하기도 하는데, 길들여졌다는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박윤석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엔드게임>은 떠나지도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복종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도 반복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내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상황과 묘하게 공통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 신체를 분리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기주봉? 신체의 각 부위에 서로 이질적인 설정을 한 복합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기주봉?
<엔드게임>에서 기주봉의 웃음 코드는 순간적이면서 감각적이다. 버럭하는 장면에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햄을 표현하는데, 목소리와 얼굴 표정으로 최대한의 감정 표현을 하면서도 몸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정지시킨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엔드게임>에서 기주봉은 온몸을 이용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신체를 분리해 연기한다고 볼 수도 있고, 온몸을 이용해 연기를 하면서도 신체의 각 부위에 서로 이질적인 설정을 한 복합적 연기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햄은 철학자이지만 극 중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계속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종의 작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작자인 사무엘 베케트 혹은 연출가 기국서는 어쩌면 자신의 욕구를 햄에게 투사했을 수도 있는데, 기주봉은 그런 햄의 욕구와 노력을 무대에서 극적으로 표현한다.
<엔드게임>은 진지한 연극이다. 감각적인 시대에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키는 신선한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퇴장하지 않은 채 공연은 끝이 나는데, 관객은 극장을 나가면서도 연극의 여운을 계속 느낄 수 있고, 극장에 와서 연극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햄과 클로브, 나그와 넬의 삶을 몰래 훔쳐보고 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