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의 첫 전기차 이름은 ‘타이칸(Taycan)’이다. ‘활기 넘치는 젊은 말’이라는 뜻의 투루크어로, 차의 성격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타이칸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지난해 11월이다.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이후 올해 6월 포르쉐 스튜디오 청담에서 시판을 알렸고, 지난 2일, 경기도 용인 삼성스피드웨이에서 열린 ‘2020 포르쉐 월드로드쇼’에서 직접 타볼 기회가 주어졌다.
시승이 열리던 날은 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다.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때문이었다. 태풍의 영어식 표현은 ‘타이푼(Typhoon)’. 공교롭게도 타이칸과 타이푼은 글자 한 자 차이인데, 이 비슷한 두 단어를 한 자리에서 경험하게 됐다.
▲드리프트 선보이며 화려하게 등장
게이트가 열리고 드디어 타이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굴러 나오나 싶던 그 순간, 뒤쪽에서 두 대의 다른 타이칸이 빠른 속도로 교차해서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간 타이칸 두 대는 타이어를 태우며 멋진 360도 드리프트를 선보이고 등장했다.
이후 기자들은 각자 속한 조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속한 조의 첫 번째 순서는 타이칸의 가속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승이 타이트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차를 천천히 둘러볼 시간은 없다. 조수석에 탄 인스트럭터는 “가속력이 엄청나니까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붙여야 한다”면서 곧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출발!”
가속 페달을 밟자 갑자기 몸이 뒤로 확 젖혀지면서 “위이잉~” 소리를 내고 차가 달려 나간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가속감이다. 타이칸 터보S의 0→100㎞/h 가속시간은 2.8초. 게다가 가속 즉시 나오는 최대토크 덕에 가속감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시승에 동원된 타이칸 터보S는 앞뒤 바퀴에 각각 1개씩 총 2개의 영구자석 동기식 모터를 장착해 오버부스트 때 761마력(560㎾)을 뿜어낸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용량은 최대 93.4㎾h이고, 빠른 충전을 위해 일반적인 400V(볼트)의 두 배인 800V 전압 시스템을 적용했다. 올해 우선 한국에 선보이는 타이칸 4S는 최고출력 530마력(390㎾), 총 용량 79.2㎾h의 싱글 덱(single-deck) 퍼포먼스 배터리가 기본 사양이다. 터보S에 비하면 출력이 낮지만, 일반적인 주행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타이칸이 특별한 건 또 있다. 감속기어만 단 일반적인 전기차와 달리 타이칸은 2단 변속기가 적용돼 있다. 1단 기어는 출발 가속 때, 2단 기어는 고속에서 효율을 담당하는 구조다.
이어서 타이칸을 끌고 서킷으로 들어섰다.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지만 타이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직한 감각을 선사한다. 통합형 포르쉐 4D 섀시 컨트롤이 전자식 댐퍼 컨트롤과 어댑티브 에어 서스펜션, 포르쉐 토크 백터링 플러스, 포르쉐 다이내믹 섀시 컨트롤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동기화한 덕분이다.
폭우 때문에 차를 한계까지 몰아붙일 수는 없었지만, 그 와중에 돋보이는 건 전자식 스포츠 사운드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오디오 스피커와 별개로 마련된 스피커로 엔진음과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기존 포르쉐 엔진만큼 감동적이진 않지만, 조용하기만 한 다른 전기차보다 훨씬 스포티한 감각이 느껴진다.
타이칸의 경우 브레이크 패드를 최초로 교체하는 시기는 첫 주행 후 6년 이후로 규정돼 있다. 높은 에너지 회수 시스템으로 일상생활 제동의 90%를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회생제동으로 가능하도록 한 덕분이다. 대신, 고속주행에서는 배터리 무게가 브레이크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느낌이다.
포르쉐 AG 이사회의 올리버 블루메 회장은 타이칸에 대해 “70년 이상 전 세계를 매료시켜온 포르쉐 브랜드의 성공적인 유산을 미래와 연결시키는 매우 중요한 제품”이라고 했다.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언제까지나 내연기관차에만 매달릴 것 같던 포르쉐는 갑자기 미래를 확 앞당겨 우리 앞에 타이칸을 선보였다.
▲911이 보여준 극적인 반전
타이칸을 타보니 911을 비롯한 다른 포르쉐 모델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의 시대가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포르쉐 홍보 담당자는 “좀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며 생각에 잠긴다. 911은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911 터보S 쿠페는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마련된 차였다. 폭우 때문에 인스트럭터가 모는 차에 동승했지만, 옆자리에서도 911 터보S의 가속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정지에서 시속 100㎞ 가속시간은 2.7초로, 구형보다 0.2초 빨라졌고 타이칸 터보S보다는 0.1초 빠르다.
시간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체감 가속력은 그보다 훨씬 크다. 타이칸이 벼락같은 가속감을 보인다면, 911은 천둥 같은 가속감이다. 이미 출발 전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엔진에서 ‘우르릉’ 소리가 나자 심장이 쿵쿵대고 숨도 가빠진다. “그래, 이게 스포츠카지”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순간적으로 타이칸에 대한 기억이 포맷되고 911 터보S가 그 자리로 들어왔다.
타이칸과 911 터보S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최고속도다. 타이칸은 시속 260㎞가 한계인데, 911 터보S는 시속 330㎞까지 나온다. 직선주로 긴 서킷이라면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성능 차이이고, 무엇보다 심리적인 만족감에서 차이가 크다.
▲짐카나 경주의 아쉬운 패배
포르쉐 월드로드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은 짐카나 경주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러버콘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이 경주에 동원된 차는 718 박스터 T다. 박스터 최초로 300마력의 2.0ℓ 터보 엔진을 장착한 이 차는 경량화된 차체로 운전의 즐거움을 높인 게 특징이다. 한국에는 아직 수입되지 않는 모델이다.
올해 코스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이었지만, 반환점을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게 관건이었다. 여기서 최대한 빠르게 돌아야 기록을 높일 수 있는데, 욕심을 내면 코스를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
앞선 참가자들의 기록은 대체로 27초 초반. 강병휘 인스트럭터는 “최강의 조답게 기록이 좋다”고 했다. 내 첫 번째 기록은 27초00으로 같은 조에서 2등. 다시 주어진 찬스에서는 26초4를 기록했으나, 정차해야 할 지점에 뒷바퀴가 살짝 덜 들어갔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이번 행사에는 타이칸과 911, 718 박스터 T외에도 다양한 모델들이 총 집결했다. 파나메라 GTS, 파나메라 GTS 스포츠 투리스모, 카이엔 터보 쿠페, 카이엔 터보S E-하이브리드 쿠페 등이 참가자들을 때론 정신없게, 때론 즐겁게 만들었다. 포르쉐 월드로드쇼에 거의 매번 참가하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새 모델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르쉐는 오는 2022년까지 60억 유로(약 8조4550억원)을 전동화에 투자할 예정이며, 오는 2028년에는 라인업의 89%를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로 구성할 계획이다. 내년 포르쉐 월드로드쇼에는 또 어떤 새 모델이 등장할지 기대가 크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