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동은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동네다
목멱산 백범광장에서 성곽에 걸터앉아 붉게 물든 한강을 바라본다. 해방촌과 후암동의 경계인 미군기지 담벼락을 따라 빌딩과 빌딩 숲 사이로 철길이 보인다. 서울역에서 용산을 향해 기차가 간 후 빌딩 숲 사이에 초록색 동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인왕산과 안산의 산줄기가 만리재를 따라 숲속에 멈춘다. 목멱산에서 만초천 물길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초천(蔓草川)은 독립문 지나 서소문역사공원 앞을 돌아 청파동까지 굽이굽이 흐른다. 청파동을 지나니 백범 김구 선생의 묘가 있는 효창원이다. 효창원은 언제 생겼을까?
만초천은 원효로 따라 한강으로 흘러가며 주변에 넝쿨이 무성한 개천이었다. 청파동에 배다리 터도 있다. 용산강과 동작진으로 가는 길목에 청파역과 배다리가 있었다. 만초천은 원효대교 아래 한강으로 흘러가며 호리병처럼 넓게 목멱산 아래 용산에 머물렀다.
만초천은 인왕산에서 한강까지 7.7km 소리없이 흘러갔다. 칡나무가 많아 갈월천, 넝쿨이 많은 풀이 있어 넝쿨내라 불리었다. 용산팔경(龍山八景) 중 하나다. 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보이지 않는 만초천이지만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린다. 용산에서 만초천을 다시 만나고 싶다.
청파동 배다리 터에서 만리재를 보면 야트막한 산이 힐끗 보인다. 빌딩과 빌딩 사이,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 숲이다. 이곳은 분명히 산이다. 인왕산과 안산에서 약현 지나 만리현까지 이어지는 산자락이다. 한강을 향해 용머리가 이어지는 형국이다. 용이 살아 한강으로 들어가 용두봉이요, 용머리가 있는 용산(龍山) 줄기다. 양지바른 산마루에 능 같은 묘가 있다.
효창원은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의 묘다. 수원화성을 짓고, 수도를 설계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현륭원’에 묻었듯, 맏아들 문효세자를 ‘효창원’에 묻었다. 슬픈 역사와 기쁜 역사가 바로 용산에서 시작한다. 역사의 공간, 기록의 공간이 효창원이다.
효창원은 옛 용산으로 불리는 곳으로 광활하고 송림이 울창한 곳에 맏아들과 부인을 효창원에 묻었다. 아니 정조의 가슴에 묻었다. 슬픈 정조의 이야기가 효창원에 있다. 역사가 담겨진 곳이다. 도성 밖 가장 가까운 추모공간이 효창원이다. 하지만 효창원은 청일전쟁에 일본군의 야영지이자 숙영지가 된다. 강화도를 통해 서울로 향하는 유일한 뱃길이다.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수운의 최적지다. 공물을 거두어 쌀과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의 별창인 만리창이 있는 새창마을도 이곳에 있다. 일본군은 효창원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효창원을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로 하여 목멱산에서 둔지산까지 군영지로 바꾸어 버렸다. 일제강점기에 효창원의 묘를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한 후 순환도로를 만들고 공원화하였다.
해방 후 바뀌었다.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조성하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송환하여 ‘삼의사묘’를 만들었다. 몸과 맘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되찾는 곳이 효창원이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까지 만든다. 기쁜 역사가 용산에서 다시 출발하였다. 이곳이 바로 효창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도 효창원에 모셨다.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묘도 효창원 동쪽 양지바른 언덕에 있다. 효창원 북쪽 언덕에 김구 선생도 함께 잠들어 있다. 뜻깊은 공간이다. 효창원은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있는 국립묘역이다. 효창공원이 아니라 효창원이다. 독립운동가 1만 5천명을 대표하는 7인을 기리는 ‘의열사’도 만날 수 있는 추모의 공간이다.
목멱산에서 한강을 가기 전 기억의 공간, 바로 효창원이다. 만초천 물소리가 들리는 역사적 공간이다. 효창원을 찾는 사람들과 효창운동장의 축구하는 소리에 효창원이 깨어나고 있다. 효창원은 사색의 공간, 그곳에서 희망을 심는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남서울예술실용학교 초빙교수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