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한 번쯤 꿈꾸는 비밀요원의 삶을 그린 007 시리즈는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 외에도 화려한 배경, 아름다운 여성, 시계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소품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자동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소품 중 하나인데 매번 007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과연 본드카는 어떤 차가 될지에 관한 관심도 높다.
또한 여러 자동차 메이커들이 007을 통한 프로모션과 마케팅을 진행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작품인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에서는 1960년대 애스턴 마틴의 대표 모델인 DB5가 등장하면서 ‘007은 애스턴 마틴’이라는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애스턴 마틴 DB5는 007 시리즈와 인연이 깊다. 1964년 ‘골드 핑거(1964)’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썬더볼 작전(1965)’에도 등장했지만, 한동안 뜸하다 ‘스카이폴(2012)’에서 다시 등장한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인연도 깊지만, 전체 007 시리즈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리스토어까지 하는 등(스카이폴의 끝부분) 그 비중이 작지 않다.
애스턴 마틴 DB5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1059대만 생산된 모델로,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카로체리아인 카로체리아 투어링 슈퍼레게라에서 담당했다. 당시 웬만한 고급사양은 모두 탑재했으며, 보디는 카로체리아 투어링 슈퍼레게라가 특허를 가지고 있는 마그네슘 합금으로 제작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델은 전부 쿠페로 DB5 중에 가장 흔한(?) 모델이지만, 123대만 제작한 컨버터블과 13대만 제작한 슈팅브레이크(왜건)도 존재한다. 2018년 8월 애스턴 마틴은 ‘골드 핑거’에 등장했던 특수 장치를 추가한 25대의 레플리카를 제작해 대당 약 285만 파운드(한화 약 46억원)에 판매했다. ‘노 타임 투 다이’에 등장하는 DB5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레플리카(복제차)로 총 8대를 스턴트용으로 제작했다.
완전 방탄유리와 헤드라이트에 설치된 두 개의 개틀링 건, 연막 발생장치, 소형폭탄 사출장치 등을 탑재했다. 오리지널 DB5는 직렬 6기통 4.0ℓ 엔진에 뒷바퀴 굴림의 2+2 쿠페로, 출력은 사양에 따라 285마력에서 325마력을 냈으며, 5단 수동변속기 또는 보그워너 3단 자동변속기가 장착됐다.
‘노 타임 투 다이’에는 DB5 외에도 애스턴 마틴이 몇 대 더 등장한다. 1987년에 개봉한 ‘리빙 데이라이트’에 등장했던 V8을 비롯해 슈퍼카인 발할라, DBS 슈퍼레게라가 잠깐 등장한다. 원래 ‘리빙 데이라이트’에 등장했던 V8은 볼란테(컨버터블) 모델에 하드톱을 씌운 모델인데, 이번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쿠페로 등장한다. ‘리빙 데이라이트’에서 사용했던 특수장비(스파이크 타이어, 스키, 레이저, 미사일 등) 장착은 알 수 없지만, V8의 등장은 007의 오랜 팬들에게 매우 반가운 존재다.
이전 시리즈에서 애스턴 마틴은 뱅퀴쉬(2002년 어나더데이), DBS V12(2006년 카지노 로얄, 2008년 퀀텀 오브 솔러스)를 본드카로 제공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애스턴 마틴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자동차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Ⅳ(AM337)와 토요타 랜드크루저 프라도(J90)다.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인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을 담당한 콰트로포르테Ⅳ는 럭셔리 GT인 콰트로포르테의 4세대 모델로,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생산됐다. 쐐기형 디자인을 가진 콰트로포르테Ⅳ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샤말이나 2세대 기블리(AM336)와 앞모습이 매우 유사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애용한 차로도 유명한 콰트로포르테는 지금도 마세라티를 상징하는 대표 모델이다.
노르웨이 추격전에서 등장하는 2세대 토요타 랜드크루저 프라도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생산됐다. 랜드크루저의 파생형 모델로 출발한 랜드크루저 프라도는 독립모델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는 토요타의 대표 중형 SUV다. ‘노 타임 투 다이’에 등장하는 2세대는 타코마, 하이럭스 서프와 구동계를 공유하며, 독립식 서스펜션을 갖췄다. 워낙에 랜드크루저 자체의 신뢰성이 높다 보니 지금도 오래된 모델이 영화에 등장하거나 전 세계의 험지를 누비고 있는 차종 중 하나다.
007 프로모션에 가장 공을 들인 자동차 메이커는 랜드로버다. 다른 편에서도 다양한 랜드로버 모델이 등장했는데, 레인지로버부터 클래식 디펜더, 올 뉴 디펜더,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자주 보인다.
랜드로버는 유일하게 007과 MI6, 그리고 그들과 맞서는 빌런 집단들이 공통으로 애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번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레트로 디자인을 적용한 올 뉴 디펜더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 레인지로버(클래식), 시리즈3 디펜더 숏보디까지 비교적 다양한 모델이 적재적소에 등장했다.
랜드로버가 등장하는 장면 중에 백미라 불리는 노르웨이에서 추격전은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후반부 주요 시퀀스로 험지를 주파하는 강인함이 돋보인다. 랜드로버가 등장할 때는 부서지고, 망가지고, 심지어 반값 정도에 불과한 랜드크루저 프라도에 유효타도 못 날리지만, 랜드로버의 등장 자체가 화면을 꽉 채우는 중압감과 박진감을 선사한다.
디펜더 광고에도 살짝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더욱 폭넓고 다양한 구도로 진행된다. 랜드로버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을 기념해 518마력, V8 5.0ℓ 슈퍼차저 엔진을 탑재한 V8 본드 에디션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 차는 전 세계에 딱 300대만 판매된다.
007 팬들에게 이번 ‘노 타임 투 다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몸 쓰는 걸로는 역대 007 가운데 최고라 불리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이라는 점과, 영화 곳곳에 숨겨진 복선과 과거 시리즈와 연관성까지 생각하면 다른 편들에 비해 좀 더 넓은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보려면 ‘스카이폴’과 ‘스펙터’ 등을 함께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원점으로의 회귀를 목표로 등장한 6대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인 애스턴 마틴과 랜드로버가 화끈하게 등장하는 ‘노 타임 투 다이’는 007 팬뿐 아니라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황욱익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