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는 순교성지다
숭례문과 소의문 사이 염천교 지나 작은 언덕이 보인다. 빌딩과 빌딩으로 덮혀 있지만 붉은 벽돌 건물이 살포시 보인다. 서소문 밖 약현성당이다. 수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던 곳이 근처다. 유교 경전인 오경 중 <예기>에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경복궁과 경희궁 사이 사직단 우측이 서소문 밖 처형장으로 도성 밖에서 가장 가까운 순교지다.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인 서소문 역사공원을 지나면 순교성지가 3곳 더 있다. 보이지 않는 소의문(昭義門)이 서쪽 소문인 서소문이다. 소실된 서소문 밖은 600여 년 전부터 한양의 공개적인 처형지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순교가 시작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정약용 형제들과 친·인척들이 목숨을 다 잃었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중림동 약현성당에는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과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이 그날의 그들을 기리고 있는 듯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진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이 청파역 지나 당고개에서도 행해졌다. 칠패시장 근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피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처형장이 당고개로 옮겨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이자 ‘땀의 순교자’인 토마스 최양업의 어머니이신 이성례 마리아등 10명이 당고개에서 순교 되었다. 슬프지만 역사적 공간이 용산에 있다. 당고개 성지는 한옥으로 황토 흙담에 옹기와 도자기 조각으로 전통적인 분위기가 더욱 애절케 한다. 당고개 순교성지에서 성인으로 올리는 ‘시성(諡聖)’과 복자로 올리는 ‘시복(諡福)’이 되었다.
교황청에서 직접 성덕이 뛰어난 사람과 공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당고개 순교성지에 ‘십자가의 길’로 조성하였다. 이곳은 높은 아파트 숲속에 있지만 엄숙한 공간으로 누구나 갈 수 있다.
순례길 따라 걸으면 한강이 나온다. 노랫속 노들강변에 얕은 모래 언덕에 억새와 나무들이 많아 ‘새남터’라 하였다. 아니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라 ‘새남’터라 부르는지 모른다. 600여 년 전부터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육신과 남이 장군도 처형된 곳이다. 한강변 새남터는 천주교 성직자와 신부들이 많이 처형된 곳이다.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의 첫 순교자다.
기해박해 때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처참하고 슬픔이 서린곳이 새남터다. 병오박해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신 김대건 신부가 효수형을 당한 곳이다. 25세의 젊은 청년 ‘피의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한복을 입고 서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성지순례 길처럼 되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탄생 200주년에 꼭 한번 걷고 싶은 길이다.
출렁거리는 한강변에서 양화진까지 절두산 성지도 보이는 곳이 새남터다. 용산구 이촌동 한강철교 북단 인근에 기와을 얹은 3층 한옥이 새남터성당이다. 한강철교 지나 용산역 가기 전 보이는 곳이다. ‘삶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사랑입니다.’ 쉽지 않은 삶의 이야기가 용산과 한강변에 숨어 있다. 겨울이 오기 전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요?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남서울예술실용학교 초빙교수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