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동은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동네다
경복궁 광화문에서 창덕궁 돈화문을 향하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다. 경복궁 궁담길 끝에 섬처럼 우뚝 서 있는 전각이 보인다. 동십자각(東十字閣)이다. 전각인 듯, 망루인 듯 오르고 싶다. 동십자각에서 좌·우를 살피니 빌딩 숲에 높은 담벼락이 보인다.
높은 담벼락 안에 무엇이 있을까? 수십 년간 담벼락 안을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금단의 땅(?)처럼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사연이 많아 최근까지 갈 수 없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소나무가 울창한 고개가 소나무고개다. 소나무고개는 솔재라 불리던 송현(松峴)이다.
600여 년 전 송현은 백악산에서 숙정문 지나 말바위 따라 산줄기가 내려온다. 산줄기는 삼청단 지나 가회동 북촌한옥마을에서 송현까지 이어져 잠시 멈춘다. 송현 옆으로 삼청동천과 안국동천 물줄기는 청계천으로 향한다. 송현은 소나무가 무성하였던 솔고개다.
송현 건너 종로구청 자리가 삼봉 정도전의 집터다. 종로소방서와 이마빌딩까지 너른 공간이 개국공신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으뜸인 삼봉 정도전 집이었다. 유학에 관한 학식이 으뜸이요, 모든 공도 제일 크다며 태조 이성계가 어필를 하사한 곳이 수진방(壽進坊) 수송동이다.
송현은 한국일보사와 종로문화원이 있던 고갯마루다. 송현동은 600여 년 전 조선의 ‘건국’과 110여 년 전 대한제국의 ‘망국’이 함께한 비운의 땅이다.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은 한양을 설계 후 송현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목숨도 잃고 역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475년 후 경복궁 중건으로 신원 되어 역사 속에 되살아난다. 망국역신 벽수 윤덕영은 경술국치에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춘 옥새를 훔친다. 윤덕영은 519년 조선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후 자작 작위를 받는다. 그 공로(?)로 송현동 일대를 차지하나 그는 아쉽게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송현동의 소유자는 있었지만 마땅한 주인이 없어 땅이 숨어 있었다. 왕실 소유의 솔숲에서 세도 가문과 친일파 윤덕영·택영 형제 그리고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까지 부침이 심한 공간이다. 최근에 삼성에서 한진그룹까지 땅의 주인이 바뀌는 굴곡진 역사 속 땅이 송현동이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땅의 쓰임을 찾아 문화의 터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울시청 광장보다 3배가 넓은 송현동에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이건희 컬렉션’을 볼 수 있게 된다. 경복궁 건춘문 옆 국립현대미술관과 용산의 둔지산 기슭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2만 3,181점보다 더 가치 있는 소장품이 한곳에 모이길 기대한다. 송현동을 중심으로 600여 년 전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이 다시 살아난다. 빛이 나는 동네를 다시 볼 수 있다.
송현동은 이제 역사의 동네, 문화의 마을, 관광의 도시로 다시 꿈틀거린다. 송현동에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을 보고, 인왕산 수성동계곡까지 걸어가 겸재 정선의 그림터도 볼 수 있는 날을 그려 본다. 그날이 온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남서울예술실용학교 초빙교수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