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타쿠미는 전직 레이서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토요타 AE86으로 두부 배달에 나선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군마의 아키나 고개를 마음껏 내달리며 레이싱 테크닉을 속속들이 익히게 된다.”
1995년 등장해 2013년까지 연재되며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던 일본 만화 ‘이니셜 D’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AE86은 실제로 많은 레이싱 입문자들을 즐겁게 한 스포츠 해치백이었다. AE86에서 A는 토요타 A 엔진을, E86은 5세대 카롤라(E80)의 여섯 번째 파생형 모델이라는 뜻이다. 정식 명칭은 ‘토요타 스프린터 트레노’인데, 그보다는 코드 네임인 AE86이 더 유명하며, 일본에서는 그냥 ‘하치로쿠, ハチロク(86)’라고 많이 불린다.
토요타는 하치로쿠의 명성을 잇기 위해 ‘토요타86’이라는 차를 2012년 내놓는다. 스바루와 공동 개발한 이 차는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드리프트를 즐기는 맛은 끝내줬지만, 튜닝 파츠를 국내에서 찾기 힘들었던 탓이다. 이와 달리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풍부한 튜닝 파츠 덕에 차를 ‘완성형’으로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앞에는 ‘GR86’이라는 신작이 다가왔다. 이 차는 과연 AE86과 토요타86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달음에 인제스피디움으로 향했다.
◆수동변속기 본연의 ‘짜릿한 맛’
토요타는 현대자동차와 맞붙고 있는 WRC를 비롯해 WEC, 르망24시 등에 가주레이싱 팀을 출전시키고 있을 정도로 모터스포츠에 진심인 브랜드다. GR86에서 GR은 토요타의 모터스포츠 브랜드 ‘GAZOO Racing’의 약자다.
전작인 ‘토요타86’이 운전의 즐거움과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양립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면, GR86은 강력해진 엔진과 차체 강성을 바탕으로 한 체급 위의 드라이빙 스킬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전작과 비교할 때 차체 너비는 그대로이지만, 높이는 10㎜ 낮췄고, 길이는 25㎜가 늘어났다. 또한 스바루 BRZ와 차이가 컸던 전작과 달리, 이번 모델은 전조등 내부/앞 범퍼 디자인 정도만 차이가 있다.
수평대향 방식의 직렬 4기통 자연흡기 엔진은 전작과 같지만, 이번에는 배기량을 389㏄ 올렸다. 덕분에 최고출력이 기존 대비 24마력 오른 231마력이 됐고, 최대토크는 25.5㎏·m로 기존 대비 3.9㎏·m 증가했다. 터보와 다운사이징이 대세인 요즘 분위기에 ‘겨우 231마력이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몰아보면 출력에 대해 아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비결은 1275㎏의 경량화된 고강도 차체와 기존 대비 10㎜ 낮아진 차체, 최적화된 서스펜션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 시승회에서 기자의 인스트럭터로 나선 현역 레이서 정의철은 “현대자동차 아반떼 N과 비교를 많이 하게 되는데, 출력은 GR86이 뒤지지만, 후륜구동이고 차체가 가벼워서 실전에서 붙어볼 만하다”라면서 “실제로 붙어보면 GR86이 조금 더 우세할 것 같다”라고 했다.
시승회는 인스트럭터가 먼저 시범 주행을 선보이고, 서킷의 스타팅 그리드에 정렬 후 직접 운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승모델은 수동변속기를 장착했는데, 자동변속기 면허만 갖춘 기자는 옆에서 동승하면서 체험토록 했다.
출발 후 느껴지는 첫인상은 변속기 스트로크가 매우 짧아서 조작감이 경쾌하다는 것이다. 대신 클러치는 매우 민감해서, 조금만 빨리 떼어도 코너링에서 차가 뒤뚱거릴 수 있다.
코너링이 민감한 이유 중 하나는 비교적 얇은 215/45/17 타이어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이즈의 타이어는 드리프트를 치기는 매우 좋지만, 스킬이 떨어지는 운전자는 고속에서 위험할 수 있다. 반면, 스킬이 좋을 경우 차체를 마음껏 미끄러뜨리며 서킷을 질주할 수 있다.
차체 강성은 구형보다 확실히 좋아졌다. 스바루 BRZ와 비교하면, GR86의 앞뒤 서스펜션 감쇄력 차이가 더 크게 설계돼 뒤를 미끄러뜨리기 좋다. 서스펜션은 앞 맥퍼슨 스트럿, 뒤 더블 위시본 타입인데, 전작에 비해 로드 홀딩 능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이어지는 드리프트 세션에서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동안 BMW 드라이빙센터에서 여러 번 시도했으나 잘 안 됐던 이른바 ‘원돌이’ 드리프트가 이뤄지는 마법을 체험한 것이다.
이는 GR86의 공격적인 자연흡기 엔진과 뒤를 미끄러뜨리기 쉬운 설계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기자는 차가 팽이처럼 돌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기자는 GR86으로 연속적인 원돌이 드리프트에 성공했고, 내친김에 8자 드리프트까지 시도해 성공했다. ‘7전 8기’의 드리프트 도전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전작과 달라진 점 중의 하나는 더 높은 엔진회전수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구형은 3200~4800rpm에서 파워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GR86은 클러치 용량과 기어 강도를 높여서 이를 극복했다. 덕분에 5000rpm 이상의 고회전에서도 파워를 끌어내는 데 부담스럽지 않다.
GR86은 국내에서 수동변속기 모델만 출시된다. 마니아층의 90% 이상이 수동 모델을 원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GR86이 오로지 수동변속기 모델만 출시되는 걸로 아는 기자들도 많은데,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는 자동변속기 모델도 출시된다. 만약 GR86의 자동변속기 모델 수요가 국내에서도 늘어난다면 앞으로 출시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GR86의 가격은 스탠다드 4030만원, 프리미엄 4630만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정도면 현대 아반떼 N을 사는 게 낫지 않느냐?”고 하는데, 내 생각엔 각기 장단점이 있다. 운전의 맛, 특히 드리프트를 즐기기에는 GR86이 더 낫고, 일상에서의 주행과 각종 편의장비 면에서는 현대 아반떼 N이 우월하다. 단지 가격만 보고 어떤 차가 더 낫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게다가 페라리 모델들보다 대략 10분 1 정도 수준의 가격으로 이 정도 운전의 즐거움을 준다면 GR86을 고르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다.
이번 시승기를 작성하면서 다른 기자들은 어떻게 썼나 체크해 보니, 상당수 기자의 기사는 시승기가 아니라 ‘수동변속기 운전 배우기’ 또는 ‘수동변속기 체험기’ 수준이었다. 최근 자동차 담당 기자 중에 수동 면허가 없는 기자가 허다할뿐더러,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동 모델을 실제로는 운전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높아지는 독자 수준에 맞지 않는 한심한 기사들이 훨씬 많은 게 한국 언론의 현주소다.
나는 GR86을 타면서 ‘펀 투 드라이빙’의 새로운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올해의 차’를 뽑는다면 당연히 최종 후보에 올릴 것이다. 수동 면허 없는 기자가 대부분인 국내 기자들이 이 차를 ‘올해의 차’ 후보에 올려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GR86의 건투를 빈다.
인제=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