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가 진안에 있다
서울에서 전주 가는 길에 진안이 있다. 전주는 알아도 진안은 잘 모른다. 전주 한옥마을엔 경기전이 있다. 전주성 안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곳이며, 전주사고 중 하나가 경기전에 있었다. 경기전과 풍남문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오목대가 보인다. 오목대는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지리산 운봉에서 황산대첩 승리 후 진안을 거쳐 큰 뜻을 품었던 곳이다.
황산대첩 승리는 이성계 장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종사관이 전략을 세우고, 왜구 아지발도를 무찌른 대전투다. 지리산 운봉과 인월에 만육 최양과 포은 정몽주도 함께한 흔적이 어휘각에 남아 있다.
600여 년 조선의 시작이 지리산 황산대첩이라면, 진안 팔공산은 만육 최양이 머물던 곳이다. 고려 말 이성계와 고향이 같고, 과거도 한 과장에서 본 사람이다. 고려 말 동문수학한 벗이 만육 최양이다. 포은 정몽주가 만육 최양의 스승이자, 외삼촌이다. 당시 대과에 3번이나 연이어 장원급제 후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석학 중 으뜸이었다.
이성계 장군을 도와 서북면 정벌에도 함께 나갔지만, 1392년 4월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 피살 후 모든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왔다. 태조 이성계가 재상 자리를 요청했으나 단박에 거절하며, 진안 팔공산 둔적소에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두문동 72현인 고려의 충신 중 한 사람이었다. 만육 최양 선생은 개성에서 전주 지나 진안까지 왜 내려왔을까? 진안 백운면 반송리 개울가에 가면 너럭바위 위에 정자와 함께 구남각(龜南閣)이 있다. 만육 최양 선생의 유허비다. 유허비는 선현들이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다.
인적이 드문 곳 사방을 둘러보니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계곡에 흐르는 물도 맑고 청량한 물소리가 거침이 없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도 올렸다. 귀부는 큰 거북이요, 이수는 황룡과 청룡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기세다.
‘오호라, 돌아가셔서 비석을 세우기까지 480년이 걸렸구나.’ 조선 6대 성리학자인 순창 출신 행주 기씨 정진의 묘갈문에 나온 내용이다. ‘만육 최선생 둔적 유허비’에는 만육의 의리를 백이·숙제 또는 엄광의 충절과 같도다고 했다.
선생의 유풍을 마치 산과 더불어 변함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명문이다. 전북 기념물 제81호를 이제야 이곳에서 만났다. ‘학문과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와 청직은 엄광과 같다’ 만육 최양 선생을 다시 함께 할 시간이다. 600여 년 전 ‘최고집’의 시작은 진안 백운면 반송리부터다. 분명하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