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게임은 ‘차덕’들에게 선물 같은 존재다. 실제로 차를 구매하지 않아도 전 세계의 수많은 명차를 현실처럼 조작하고 타볼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1997년 세상에 처음 나온 소니(SONY)의 ‘그란투리스모’는 차원이 달랐다. ‘리얼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라는 수식어처럼 현실감에 무게를 둔 덕에, 단순한 개임이 아닌 실제 자동차를 조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는 2005년에 ‘플레이스테이션2’와 ‘그란투리스모 도쿄-서울’을 함께 구매하면서 이 시리즈를 처음 접했다. 이 시리즈에는 현대자동차의 차도 등장했는데, 양산차로는 투스카니와 베르나 WRC카, 콘셉트카로는 HCD-6와 클릭스가 나왔다. 당시 하루가 멀다고 투스카니로 남대문과 광화문 일대를 질주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한동안 푹 빠져 있던 이 게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일단 게임을 시작할 때 TV와 연결해야 하는 수많은 케이블이 번거로웠다. 계속 연결해두자니 TV에 주렁주렁 달린 케이블이 보기 안 좋았고, 게임을 할 때마다 연결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다.
또, 당시에는 드라이빙 시트를 구매할 여유가 없어서 밥상(!)에 레이싱 휠을 고정하고 조작했는데, 급격한 조작 때마다 밥상이 들썩거리는 것도 조작감을 떨어뜨렸다.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일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플레이스테이션과 그란투리스모 시리즈는 작년부터 스멀스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창고에 두었던 레이싱 휠을 꺼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플레이스테이션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업계 후배들이 하나둘씩 플레이스테이션5를 구매했다는 인증사진을 SNS에 올릴 때마다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그러던 차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플레이스테이션 홍보 담당자가 플레이스테이션 5와 VR2 기기를 체험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홍보 담당자는 “450개 정도의 VR 쇼룸과 함께 개러지 장소, 조명 세팅도 가능한 게 특징”이라고 차분하게 말했지만, 얘기를 듣고 있는 나는 이미 게임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전원을 켜고 그란투리스모 7 게임 속으로 들어가면, 인트로에서 인류가 달을 정복하는 순간이나 비행기를 개발하던 시기의 라이트 형제 모습 같은 근대사가 빠르게 스쳐 간다. 그리고 출발선에 서 있다가 달려가서 시동을 걸던 르망 경주를 비롯해 카레이스의 명장면들도 속속 등장한다. 인트로 후반부에서는 포르쉐의 전기차 타이칸이 제작되는 모습이 등장한다. 과거 역사적인 순간들 덕분에 이 그란투리스모가 만들어진 것 같은 웅장한 느낌이랄까. 이어서 현실로 돌아와 일본 스즈카 서킷에서 벌어지는 각종 레이스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지는데, 이를 감상하는 것도 즐겁다.
VR 기기를 처음 얼굴에 쓰면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 서서 조작할지, 앉아서 조작할지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사용자가 자리한 공간을 VR 기기가 스캔하기 시작한다. 사용자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게임에 반영하려는 목적 같다.
그란투리스모 7 설치 과정은 시간이 좀 걸린다. 이 과정이 지루할까 봐 제작진은 ‘뮤직 랠리’라는 게임을 넣었다. 클래식카를 타고 음악을 들으면서 프로그램 설치를 기다리라는 배려다. 1948년에 처음 나온 포르쉐 356이니 빠르게 달리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느긋하게 달려보는 느낌도 근사하다.
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자동차를 고르는 순간이 온다. 가이드인 사라는 “처음에는 기본적인 차량으로 시작해야 한다”라면서 일본 소형차를 권한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2011년형 토요타 아쿠아 S와 2015년형 마쓰다 데미오, 두 가지 중에 골라야 한다. 이때 자동차 옆에 표기된 점수가 좋은 선택 가이드가 된다. 자동차의 종합적인 성능을 나타낸 수치인데, 토요타 아쿠아가 점수가 더 높아서 선택했다.
당연한 얘기 같겠지만, 이 점수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아쿠아로만 하다가 데미오로 바꿔서 같은 코스를 경험해보니, 운전자의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카페에서 만난 스텔라는 “데미오는 2019년부터 일본에서 마쓰다 2로 불린다”라고 귀띔한다. GM과 BMW, 마쓰다에서 활동했던 톰 마타노(마타노 츠토무)도 등장한다. 그는 전설적인 MX-5 미야타를 디자인한 이로 유명하다. 그는 “작은 생쥐 같은 자세인데, 일반적인 박스카라기보다 달리기의 즐거움이 있는 차”라고 설명한다.
본격적인 주행에 나서자 VR 기기는 장단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현실감각에 있어서는 VR 기기만 한 게 없다. 특히 주행 중에 정면만 응시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는데, 이때 느낌이 오묘하다. 시선 트래킹과 햅틱 진동 반응은 1세대 기기보다 진일보한 기능이다.
하지만 연이어 레이스를 하다 보면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특히 기자처럼 50대에 접어들어 노안이 온 사람이라면 더 빠르게 느낄 수 있다. 도전을 너무 연속해서 하다 보면 사라가 “잠시 쉬었다가 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럴 땐 사라의 말을 듣는 게 좋다.
여기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다. 홍보 담당자로부터 “리뷰용 레이싱 휠이 들어왔는데 체험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자동차 게임을 레이싱 휠로 즐길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도착한 트러스트마스터 T248 제품은 오래전에 쓰던 로지텍 제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주행 때의 피드백이 훨씬 정교해졌고, 페달 높이를 원하는 만큼 조정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한편 중고차 매장으로 가면, 그동안 모은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차들이 뜬다. 이곳에는 앞서 언급한 세 종류의 일본 소형차 외에도 2009년형 알파로메오 미토, 1978년형 폰티악 파이어버드 트랜스 암, 1985년형 오토미안치 A112 압바스 등이 있다. 간혹 품절 차량도 나오니까 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빨리 구매하는 게 좋다.
기자가 들어갔을 땐 1994년형 닛산 R32 GT-R과 1988년형 토요타 수프라, 2007년형 아우디 R8 등의 재고가 없었다. 현실에서 인기 있었던 차는 그란투리스모 세계에서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들을 구매하려면 열심히 레이스를 뛰어 크레딧을 모아야 하므로 게임에 푹 빠져들게 되는, ‘선순환’ 구조로 설계돼 있다. 기자는 간간이 모은 크레딧을 활용해 1990년형 마쓰다 RX-7을 골랐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연식이 오래됐어도 RX-7은 아쿠아나 데미오에 비하면 신세계(新世界)였다. 전성기 시절의 실제 차를 몰지 못했던 한을 이렇게라도 풀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렇게 RX-7으로 또 열심히 크레딧을 모은 덕에 제품 반납을 앞두고 2009년형 포르쉐 911(997)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00마력대로 시작해 400마력으로 마무리한 아름다운 여정을 포르쉐와 함께 한 것이다.
자, 드디어 리뷰 제품과 헤어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한 달여 동안 정이 들었는지 제품을 박스에 담으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정말이다). 그만큼 만족스러웠다는 뜻일 거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그란투리스모 시리즈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어떤 제품이라고 좋은 것만 있겠나. 그러나 레이싱 게임에 입문하는 이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제품이고, 여기에 VR 기기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리뷰를 읽고 궁금해지셨다면 지금 당장 지르시라.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