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열리기 전, 잠시 쉬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여섯 대의 명차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지난 10월 5일,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서 열린 뉴 5시리즈 행사장의 풍경이다.
이 자리에는 한국에 공식 수입되지 않았던 2세대 5시리즈를 비롯해 3, 4, 5, 6, 7세대 모델이 한자리에 모였다. BMW는 과거에도 3시리즈 시승행사장에 이렇게 올드카들을 모아놓은 적이 있다. 과거의 유산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해하는 브랜드답다.
BMW의 중심 모델인 5시리즈는 1972년 처음 탄생했다. 1세대(E12) 모델 이후 51년이 지나 이 차는 어느덧 8세대로 진화했다. 그리고 8세대 신차의 첫 공식 시판 시장은 한국으로 결정됐다.
뉴 5시리즈의 실물은 지난 9월 독일 뮌헨 모빌리티쇼에서 처음 만났다. 대부분 차가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 편이지만, 뉴 5시리즈는 훨씬 멋졌다. 크리스 뱅글이 만든 E60과 유사한 앞모습을 비롯해 뉴 7시리즈와 비슷한 대시보드, 고급스러운 실내가 돋보였다.
차체 크기는 길이 5060㎜, 너비 1900㎜, 높이 1515㎜이고 휠베이스는 2995㎜다. 직전 모델의 경우 길이는 4965㎜, 너비 1870㎜, 높이 1480㎜이고 휠베이스는 2975㎜였으므로 모든 부분에서 사이즈가 커졌다. 차체 높이가 1500㎜를 넘어가지만, 결코 껑충해 보이지 않는다. 차체 길이와 너비를 적정히 늘여 균형감을 잘 갖춘 덕분이다.
내년에 수입될 신형 E클래스와 비교하면 길이, 너비, 높이, 휠베이스 모두 5시리즈가 크다. 제네시스 G80의 경우 너비(1925㎜)와 휠베이스(3010㎜)가 5시리즈보다 우위에 있다.
대시보드는 최근 BMW가 선보이는 차들처럼 대형 파노라믹 커브드 디스플레이(12.3인치+14.9인치)가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최신의 OS 8.5는 여러 메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필요한 기능에 진입할 수 있는 '퀵셀렉트' 기능을 갖춰 더욱 편리해졌다.
대시보드 아래에는 7시리즈에 적용된 인터랙션 바가 장착된다. 길게 드리워진 크리스털 바는 앰비언트 라이트 기능뿐 아니라 승객이 타고 내릴 때 웰컴/굿바이 라이팅 기능도 있고, 비상등을 겨면 바(bar) 전체가 깜박거린다. 점등되는 부위가 워낙 커서 작동할 때마다 신기해 보인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앞뒤 승객이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게임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차박을 즐길 때 매우 유용한 기능이다. 이는 뉴 5시리즈를 통해 처음 선보이는 기능이다.
실내는 블랙과 브라운 두 가지다. 시트와 대시보드, 도어 패널, 스티어링 휠에는 5시리즈 최초로 '베간자(Veganza)'라고 부르는 완전 비건 소재를 사용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조가죽인데, 질감이 천연가죽 못지않게 좋다. 520i와 523d에 기본 적용되고, 530i에는 이보다 고급스러운 인디비주얼 메리노 가죽이 적용된다.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서 열린 뉴 5시리즈 발표회와 시승회에서 추첨으로 결정되는 시승 모델은 530i가 당첨됐다. 내심 전기차보다는 내연기관이 걸리길 바랐는데,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 전기차가 급속히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연기관 비중은 훨씬 크기 때문에 이 차의 리뷰는 더욱 중요하다.
530i라면 3.0 엔진을 쓴 것 같지만, BMW가 그 공식을 무너뜨린 지는 좀 됐다. 현재는 직렬 4기통 2.0 엔진의 고성능 버전으로, 시승차는 최고출력 258마력, 최대토크 40.8㎏·m다. 이 엔진은 3시리즈, X3, X4 등에 두루 쓰이는데, 뉴 5시리즈와의 궁합은 어떨지 정말 궁금했다.
출발은 상당히 부드럽고, 풀 가속을 시도하면 1마력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바퀴에 고스란히 전달한다. 엔진의 회전 질감이 좋고, 미션과의 궁합도 찰떡같다. 높은 rpm에서도 엔진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하부 소음과 바람 소리도 비교적 잘 차단된다. 정지에서 시속 100㎞까지 걸리는 시간은 6.1초로, 520i의 8.1초보다 2초나 빠르다.
더욱 인상적인 건 주행안전성이다. 주변을 확인한 후 안전한 상태에서 차체를 이리저리 흔들어봤는데, 무게 중심이 낮게 설정된 데다 서스펜션 조율이 잘 되어서 바퀴가 착 달라붙어 달린다. 주행 중 만난 심한 요철에서도 뉴 530i는 부드럽게 떴다가 살며시 가라앉는다. 이 정도면 7시리즈 승차감이 부럽지 않겠다.
휠은 520i와 523d는 19인치, 시승차인 530i는 20인치를 장착했다. 시승차에는 피렐리 P-제로 타이어가 장착됐는데, 차의 서스펜션 셋업과 아주 좋은 궁합을 보여줬다.
시승회에 참가한 기자 중 일부는 주행성능이 맘에 안 든다는데, 이해되지 않는다. 2.0 가솔린 엔진을 얹은 준대형 세단에서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차가 있었던가?
간혹 앞좌석과 뒷좌석 승차감이 너무 다른 차들도 있는데, 이 차는 그렇지 않았다. 반환점에서 동승한 기자에게 운전석을 맡기고 뒷좌석에 앉으니 잠이 스르르 올 정도로 편안하다. 다만 차체 크기에 비해서 뒷좌석이 아주 넓지는 않다. VIP를 모시는 분들이라면 돈을 좀 더 쓰시고 7시리즈로 넘어가시길 추천해 드린다.
연비는 시리즈 중 가장 좋은 523d가 도심 13.5㎞/ℓ, 고속도로 16.5㎞/ℓ, 복합 14.7㎞/ℓ이며, 시승차인 530i x드라이브는 도심 9.9㎞/ℓ, 고속도로 13.0㎞/ℓ, 복합 11.1㎞/ℓ다. 준대형 가솔린 승용차의 복합 연비가 10.0㎞/ℓ를 넘는다면 꽤 괜찮은 편으로 볼 수 있다. 모든 5시리즈 내연기관에 적용된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도 좋은 연비에 한몫했다.
가격은 뉴 520i가 6880만~7330만원, 뉴 523d가 7580만~8330만원, 뉴 530i xDrive가 8420만~8870만원이며 순수전기 모델인 뉴 i5 eDrive40이 9390만~1억170만원, 뉴 i5 M60 xDrive가 1억3890만원이다. 개인적으로는 530i도 상당히 만족스럽지만, 시승회에서 타보지 못한 i5도 궁금하다. 실제로 타본 이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이어서 추후 시승차를 받아서 직접 평가해볼 예정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한자 성어로 '화양연화'라고 한다. 1972년 탄생한 BMW 5시리즈가 8세대로 진화한 지금이 5시리즈에게는 '화양연화' 같은 시기가 아닐까.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