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잘 나가던 전기차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전기차' 하면 일시적 수요 정체를 뜻하는 '캐즘'이라는 단어도 기사에 수시로 등장한다.
전기차 수요가 주춤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충전의 불편함과 비싼 가격을 꼽는 이들이 많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 두 가지가 해결된다면 전기차로 갈아탈 이들이 많다는 의미다.
기아가 최근 선보인 EV3는 바로 그 점에 집중해 만든 새로운 전기차다.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가격, 긴 주행거리로 전기차의 수요 정체를 끊어낼 기아의 신작을 서울 성수동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몰아보면서 장단점을 체크해봤다.
EV3의 크기는 길이 4300㎜(GT 라인 4310㎜), 너비 1850㎜, 높이 1550㎜(GT 라인 1570㎜)이고, 휠베이스는 2680㎜다. 현대 코나 일렉트릭과 비교하면, 길이는 EV3가 55㎜ 짧지만 휠베이스는 20㎜ 길다. 너비 또한 코나보다 25㎜ 넓다.
곧 한국에 데뷔할 볼보 EX30보다는 EV3의 휠베이스가 30㎜ 길고 차체도 67㎜ 길다. 벤츠 EQA와 비교하면, 휠베이스는 EV3가 49㎜ 짧고 차체는 165㎜ 짧다. 또한 EV3는 BMW ix1보다 휠베이스가 10㎜ 짧고 차체는 200㎜ 짧다. 전체적으로 EV3는 앞뒤 오버행을 줄인 덕에 차체 길이에 비해 휠베이스가 넉넉하다.
차체는 아담하지만, 트렁크는 꽤 넓다. 특히 2단 선반을 적용해 바닥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돋보인다. 보닛 아래에는 작은 프렁크를 마련했는데, 그동안 현대차와 기아가 자주 쓰던 프렁크 덮개를 생략했다. 대신 보닛 흡음재에 프렁크를 밀폐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적용해 자연스럽게 프렁크가 덮이도록 했다.
실내에서는 잘 정돈된 계기반과 독특한 사이드 테이블이 눈길을 끈다. 사이드 테이블은 안으로 넣었다가 필요할 때 빼서 음식을 놓고 먹거나 노트북을 올려 작업하는 데 쓸 수 있다. 그런데 시승회에서는 “물건이 고정되지 않아 뭔가 올려놓기에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 부분은 향후 기아가 개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승차감은 무난하다. 다양한 노면에서 훌륭한 적응력을 보여주었던 EV9보다는 못하지만, 동급 소형 SUV 중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한다. 타이어는 19인치와 17인치 등 두 가지 사이즈이고, 금호(17인치)와 넥센·한국(이상 19인치) 등 세 가지 브랜드를 적용했다. 시승차에는 한국타이어의 전기차 전용 타이어인 아이온 에보 AS가 장착돼 있었는데, 그립력이 좋아서 운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가속력은 차급을 생각하면 괜찮은 편이다. 최고출력 150㎾(204마력)에 최대토크 28.9㎏·m로 파워는 무난한 수준이지만. 전기차치고는 공차중량(1750~1850㎏)이 가벼워 몸놀림이 가볍다.
경쟁차의 공차중량은 ix1이 2085㎏, EQA가 1985㎏, EX30이 1810㎏, 코나 일렉트릭이 1720~1740㎏이다. 최고출력은 ix1이 314마력, EX30이 268마력, EQA가 188마력, 코나 일렉트릭이 204마력이고, 마력당 중량비는 ix1이 6.64, EQA가 10.56, EX30이 6.75, 코나 일렉트릭이 8.43~8.53, EV3가 8.58~9.07이다. 마력당 중량비는 1마력이 감당하는 차체 중량을 뜻하는 것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좋은 가속력을 기대할 수 있다.
EV3는 현대차와 기아가 자랑하는 가상 사운드가 탑재되지 않아 운전하는 내내 심심했다. 전기차는 엔진 소리가 없어서 주행감이 밋밋하기 일쑤인데, EV3는 그 점에서 아쉽다. 이에 대해 기아 연구원은 “EV3는 고성능 콘셉트카 아니어서 여러 가상 사운드를 탑재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즉, 주행모드에 따른 성능 차이가 크지 않은데 소리만 여러 버전으로 나오는 건 어색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어차피 '가상 사운드'이기 때문에 차의 성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필요는 없다. 기아 연구원이 “향후 필요성을 검토해 탑재 여부를 결정하겠다”라고 했으니, 앞으로의 변화를 기대해봐도 좋겠다.
이 차에 탑재된 생성형 AI 기술도 흥미롭다. 그동안 현대차와 기아의 모델들에도 음성인식 기능은 “오늘 날씨 어때?” 같은 정해진 답변만 가능했지만, 생성형 AI는 더욱 다양한 답변을 할 수 있는 게 차이점이다. 이날 시승회에서 “임의택 기자에 대해 알려줘”라고 물어보니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자동차 전문기자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29년 기자 인생이 헛된 것 같지 않아서 기분이 뿌듯했다.
EV3의 인증 전비는 17인치 기준으로 도심 5.5~5.9, 고속도로 4.6~4.8㎞/kWh이고, 1회 충전 주행거리는 복합 기준으로 스탠더드 347~350㎞, 롱레인지 478~501㎞다. 전비와 주행거리가 뛰어나니 기아로서는 자랑할 법도 한데, 역시 시승회에서 전비(연비) 대결이 벌어졌다. 기자는 춘천 기착지까지 7.8㎞/kWh를 기록해 참가자 중 최고 전비를 찍었다. 순위표 가장 아래쪽의 기록이 6.5㎞/kWh일 정도로 EV3의 전비는 평균적으로 훌륭했다.
이러한 뛰어난 전비의 배경에는 이번에 최초로 적용된 i-페달 3.0 기능이 있다. 가속 페달만으로 가속과 감속, 정차까지 지원하는 i-페달 기능을 모든 회생제동 단계에서 가능하게 한 것. 종전에는 회생제동이 가장 강력했을 때 이 기능이 작동하도록 했는데, 가·감속 때 충격이 크다는 고객의 불만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바꾼 것이다.
EV3의 배터리 용량은 스탠더드 58.3, 롱레인지 81.4kWh다. 동급의 현대 코나 일렉트릭이 각각 48.6, 64.8kWh인 것에 비해 배터리 용량이 대폭 늘었다. 이번 전비 테스트에서 기자가 기록한 7.8㎞/kWh의 전비를 배터리 용량에 대입하면, 1회 충전으로 635㎞까지 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정도면 내연기관과 비교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겠다. 특히 코나 일렉트릭은 스탠더드가 135마력(99㎾), 롱레인지가 204마력(150㎾)으로 출력 차이가 있지만, EV3는 배터리 용량에 상관없이 최고출력이 동일하다는 차이점도 있다.
EV3의 가격은 친환경차 세제 혜택 후 기준으로 3995만~4850만원이다. 어스 롱레인지에 드라이브 와이즈와 헤드업 디스플레이, 모니터링, 하만카돈 프리미엄 사운드, 19인치 휠&타이어, 와이드 선루프를 더하면 5457만원이 된다. 여기에 정부 보조금 573만~622만원과 지자체 보조금을 적용하면 서울시에서는 4000만원 중반에 구매가 가능하다. 욕심을 버리고 기본형인 에어 스탠더드에 옵션을 추가하지 않으면, 보조금을 받고 3300만원 정도로 구매할 수 있다.
EV3는 정체된 전기차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게임체인저다. EV3를 계기로 실속 있는 전기차가 더욱 다양하게 나오면 해외에서도 큰 활약이 기대된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