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경차가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큰 차를 선호하는 추세가 뚜렷한 데다, 전기차 등의 친환경차 혜택이 꽤 크기 때문이다. 크게 남는 것 없는 시장이라 쉐보레는 경차 스파크와 다마스, 라보를 몇 년 전에 생산 종료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캐스퍼 일렉트릭은 매우 신선하다. 경차와 전기차의 조합은 기아 레이 EV에도 있었는데, 캐스퍼는 경형 SUV 스타일이어서 더욱 독특해 보인다.
캐스퍼 일렉트릭의 차체 크기는 길이 3825㎜, 너비 1610㎜, 높이 1575㎜, 휠베이스 2580㎜다. 캐스퍼 가솔린 모델(길이 3595㎜, 너비 1595㎜, 휠베이스 2400㎜)과 비교해 높이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커졌다. 길이와 너비가 커지면서 경차 혜택은 받을 수 없지만, 대신 전기차가 누리는 혜택은 고스란히 받는다.
늘어난 휠베이스는 실내공간을 키우는 목적도 있지만, 적정 배터리 사이즈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캐스퍼 일렉트릭을 개발한 지정훈 연구원은 “기존 사이즈라면 주행거리가 270㎞ 정도였을 텐데, 300㎞ 이상을 확보하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315㎞가 나왔다”라고 설명했다. 315㎞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캐스퍼 일렉트릭은 광주 글로벌 모터스(GGM)에서 생산한다. 배터리 용량 10%에서 80%까지는 120㎾ 급속충전으로 30분이 걸린다.
현대차 홈페이지에 있는 캐스퍼 일렉트릭의 주행거리 계산기를 살펴보면 실제로 주행 가능한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된다. 예를 들어 에어컨이나 히터의 작동 여부를 비롯해 외부 온도(-10~30℃), 도심과 고속도로 주행 비중 등을 입력하면 여기에 맞게 주행거리가 다르게 표시된다. 이 계산기로는 15인치 휠을 단 모델로 에어컨이나 히터를 끄고 외부 온도 20~30℃일 때 도심 비중을 90%로 설정하면 373㎞까지 나왔다. 반면 17인치 휠을 단 모델로 에어컨이나 히터를 켜고 영하 10℃ 상태에서 고속도로를 90% 달리는 상황에서는 254㎞로 줄었다.
요즘 관심이 높아진 배터리 제조사는 LG에너지솔루션으로, 49kWh 용량의 파우치형 NCM 배터리를 카펙발레오가 패키징했다. 현대차 연구원은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승객이 대피하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배터리 열전이 지연 기술을 적용했다”라고 설명한다.
경쟁차인 기아 레이 EV는 기존 차체를 활용해 전기차로 만들다 보니, 배터리 용량이 35.2kWh에 불과하고, 주행거리도 복합 205㎞에 머문다. CATL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탑재한 것도 캐스퍼 일렉트릭과의 차이점이다.
가솔린 모델보다 180㎜ 늘어난 휠베이스는 뒷좌석 레그룸에 80㎜, 트렁크에 100㎜ 배분됐다. 덕분에 기존 모델보다 뒷좌석과 트렁크 공간이 훨씬 넉넉해졌고, 후방 추돌에 의한 상해 가능성도 작아졌다. 트렁크 바닥은 두 단계 높이로 조절할 수 있는데, 바닥을 낮추면 꽤 큰 화물용 캐리어도 수납할 수 있다.
최고출력은 84.5㎾(115마력), 최대토크는 15.0㎏·m다. 출력은 스마트 스트림 가솔린 1.0의 76마력이나 카파 1.0 터보의 100마력보다 높지만, 최대토크는 카파 1.0 터보의 17.5㎏·m에 못 미친다.
이러한 수치는 주행 특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캐스퍼 터보는 터보차저가 작동할 때 '훅'하고 튀어 나가는 느낌이 있는데, 캐스퍼 일렉트릭은 빠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스마트 스트림 엔진보다는 훨씬 역동적이고, 무엇보다 저속에서 엔진 힘이 붙기 전에 나타나는 가속 스트레스가 적다.
다만 시승회가 열린 날처럼 폭우가 쏟아질 때는 약점도 보였다. 차체가 작은 경차인데다, 타이어 사이즈도 얇고 작은 편이어서 물웅덩이가 깊게 자리한 곳을 지나는 순간에 차체가 좌우나 앞뒤로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다. 중형차였다면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캐스퍼 일렉트릭을 몰 때는 노면 상황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다.
타이어는 한국과 금호, 넥센 세 가지가 장착된다. 15인치는 한국과 금호, 17인치는 한국과 넥센인데, 시승차에는 205/45 R17 넥센타이어가 장착됐다. 세 브랜드의 타이어는 회전저항(2등급)과 젖은 노면 제동력(3등급), 타이어 소음도(A)가 모두 동일한데, 한국타이어의 17인치 제품만 소음도가 AA로 우수하다.
이 차에는 '페달 오조작 안전 보조(PMSA)' 기능이 들어있다. PMSA 기능은 정차 또는 정차 후 시속 3㎞로 달릴 때 0.25초 이내에 가속 페달을 100% 밟을 때 전후방 1m 거리의 물체를 감지하고 충돌을 막는다. 지름 75㎜, 높이 1m 이상의 사람이나 오토바이, 자전거도 감지해낼 수 있다. 초음파 센서로 사물을 감지하고,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우선 가속 토크가 제한되고 클러스터에 경고등이 표시되며,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제동 제어가 작동한다.
이날 시승회에서는 이 기능의 시연도 진행됐다. 그런데 시연이 워낙 순식간에 이뤄진데다, 직접 시연할 수 없고 운전자 옆에 타고 지켜보는 방식이어서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인증 전비는 15인치 모델이 도심 6.2, 고속도로 4.9, 17인치 모델이 도심 5.7, 고속도로 4.7㎞/kWh다. 이날 시승회에서 기자가 기록한 전비는 평균속도 27.9㎞/h에서 6.9㎞/kWh였다. 전비를 높이기 위해 살살 달리지 않고 에코, 노멀, 스포트 등 다양한 모드로 달렸을뿐더러, 비가 내리는 도로여서 여건도 녹록지 않았다. 따라서 마른 노면에서 정속 주행을 한다면 더 좋은 전비가 기대된다.
캐스퍼 일렉트릭의 가격은 세제 혜택 후 기준으로 2990만원이고, 여기에 모든 옵션을 더하면 서울 기준으로 배송비와 전기차 보조금을 포함해 2838만1946원이다. 만약 아무 옵션을 달지 않으면 같은 조건에서 2372만9899원으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캐스퍼 가솔린 모델과 비교해서 유지비는 어떨까? 1년에 2만㎞를 달린다고 가정하면 캐스퍼 일렉트릭이 자동차세·보험료는 조금 더 비싸지만, 유류비가 캐스퍼 가솔린 모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7년을 타면 787만원 정도 덜 든다. 이는 인스퍼레이션 트림 기준으로, 가솔린과 일렉트릭의 가격 차이 520만원은 5년 정도 운행하면 상쇄된다.
만약 1년에 1만5000㎞씩 2년을 운행하면 이 격차는 약 162만원으로 확 줄어든다. 차를 자주 바꾸는 이들에게는 경제적 이점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캐스퍼 일렉트릭은 단순히 유지비를 절약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기차 특유의 운전 즐거움에 상대적으로 넓은 뒷좌석과 트렁크 공간을 누리고 싶은 이에게 어울리는 차다. 차체가 커지면서 경차 혜택은 누리지 못하고 전기차 혜택만 누리게 됐지만, 전기차와 경차 혜택을 국가가 함께 제공한다면 보급이 더 늘어나리라 생각된다. 전기차 보조금은 5000만원 이상의 비싼 차보다는 캐스퍼 일렉트릭 같은 차에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게 바람직하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