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가 타시던 차는 현대 마크Ⅴ(파이브)였다. 해가 질 무렵, 아버지가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여시고 집 마당으로 마크Ⅴ를 세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마크Ⅴ 이후 대우 슈퍼살롱, 기아 포텐샤로 갈아타셨다.
갑자기 아버지가 타시던 차를 떠올린 건,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서 열리는 ‘현대 헤리티지 위크(Hyundai Heritage Week)’의 여러 프로그램 중 포니, 스쿠프, 그랜저를 동승 체험해보는 행사에 초대된 덕분이다. 이 자리에서 1986년 처음 출시된 1세대 그랜저(속칭 ‘각 그랜저’)를 오랜 만에 만났다.
아버지가 마크Ⅴ 이후 대우 슈퍼살롱으로 갈아타시면서 그랜저를 가까이 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모시는 그랜저를 몇 번 타본 것이 전부였는데, 묵직한 슈퍼살롱과 달리 좀 더 세련된 차라는 느낌이 강했다.
시승은 현대모터스튜디오 시승센터 대기실에서부터 시작됐다. 시승을 도와준 최우빈 구루는 “고객님을 위해 준비했다”면서 자동차 모양의 나무 모형을 내민다. 뚜껑을 열어보니 내 이름이 새겨진 명판과 함께 시승차의 키가 담겨 있다. 나를 위해 이런 것까지 준비하다니…. 너무 감동해서 “이 나무 모형은 주시는 거죠?”라고 했더니 다시 써야한다며 그냥 두란다. 좋다가 말았다.
첫 출시 후 무려 34년이 지났지만 그랜저는 여전히 멋졌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나이 드신 아버지와 마주할 때처럼, 왜소해 보이는(?) 외모가 살짝 안쓰럽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세대 그랜저의 전장은 4865㎜에 이르지만 휠베이스는 2735㎜에 불과하다. 7세대 아반떼(CN7)의 휠베이스가 2720㎜이니, 1세대 그랜저가 왜소해 보이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1990년식인 시승차의 주행거리는 17만9000㎞ 정도. 연식에 비해 의외로 주행거리가 짧다. 최우빈 구루는 “당시에는 ‘메다(주행거리 적산계)’를 꺾는 일이 다반사여서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귀띔한다. “젊으신 것 같은데 ‘메다를 꺾는다’는 말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어릴 때부터 차를 엄청 좋아했단다. 1세대 그랜저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고. 나이 차이가 20년이 넘는 기자와 구루는 1세대 그랜저 덕에 즐거운 이야기를 이어갔다.
운전하는 구루를 보니 계기반 오른쪽 아래에 크루즈 컨트롤(정속 주행장치) 버튼이 달려 있다. 지금이야 반자율 주행장치를 탑재한 차들이 많이 늘었지만, 당시에는 크루즈 컨트롤은 아주 보기 드문 장비였다. 시속 30㎞를 넘어가면 자동으로 도어가 잠기는 ‘오토 도어록’도 쌩쌩하게 작동한다.
헌데 스티어링 휠이 너무나도 얇아 보인다. 잡으면 손가락 사이가 허전할 정도로 얇고, 그립감은 언감생심이다. 아마도 뒷좌석에 앉은 사장님이나 회장님을 위해 우아하게 운전하려면 이 정도의 굵기가 적당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신기하게도 조수석 도어트림에 재떨이가 달려 있다. 뒷좌석 도어트림에 달린 재떨이는 이해가 되는데, 조수석 도어트림에는 왜 재떨이가 달렸을까? 조수석에 앉은 회장님 비서가 맞담배를 피울 때를 대비한 걸까? 아니면 오너드라이버 남편과 맞담배를 피우는 부인을 위한 걸까?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연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시트는 벨벳 소재다. 당시에는 가죽시트의 품질이 지금 같지 않았기 때문에 직물이나 벨벳 소재가 고급차에 두루 쓰였다. 촉감은 지금 만져 봐도 아주 부드러운데, 소재의 특성상 먼지가 많이 달라붙는 게 단점이다.
직렬 4기통 2.0ℓ 161마력 시리우스 엔진을 얹은 시승차의 최고속도는 162㎞. 하지만 30년이나 된 차이기에 엔진 성능이나 승차감을 논하는 건 이 차에 실례일지 모른다. 이날 동승을 하는 도중에는 기어가 빠지면서 시동이 꺼지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자동변속기 차가 왜 시동이 꺼질까 싶지만, 이렇게 차가 굴러가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승 도중 신호대기에 걸려 잠시 서 있으니, 횡단보도를 지나다가 이 차를 뚫어져라 보는 이들이 꽤 있다. 단순히 오래된 차라서 보는 게 아니라, 이 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최우빈 구루는 “포니, 스쿠프도 알아보는 분들이 꽤 많다”고 한다.
시승을 마치고 차를 천천히 둘러본다. 보닛을 열어보니 예상보다 엔진이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 다만 안쪽을 들여다보니 오일이 샌 흔적이 있다. 구루에게 알려주니 “몰랐는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한다. 오래된 차를 관리하는 건 돈뿐 아니라 많은 시간과 애정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트렁크도 열어봤는데, 구루가 트렁크 도어를 잡고 있다. 트렁크 도어를 지지해주는 가스 리프트가 망가졌단다. 그것 빼고는 내부 상태가 깔끔하게 잘 관리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1세대 ‘각 그랜저’와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동승을 마치고 느낀 건 크게 두 가지다. 지금이라도 현대자동차가 역사를 되돌아보려한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리고 포니, 스쿠프, 그랜저로 끝날 게 아니라 이후에 나온 차들도 계속 되돌아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야타족’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쏘나타Ⅱ(1993)와 이를 바탕으로 만든 마르샤(1995), 본격적인 한국 스포츠카의 장을 열었던 티뷰론(1996) 등이 아직 우리 마음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현대차가 앞으로 보여줄 헤리티지 드라이브에는 또 어떤 차가 나올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