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은 원각사와 팔각정이 있던 낙원동이다
원각사는 한양도성 안 가장 큰 사찰이었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이 탑골공원을 지키고 있다. 아니 탑골공원이 국보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지켜오고 있다. 누가 세웠을까? 4.7m 높이의 보물인 원각사비 안에 쓰여 있다. 두려움이었을까? 바램이었을까.. 두 마리의 용이 날 듯, 큰 거북이 미소를 지으며 꼬리를 살며시 감춘다. 원각사는 도성 안 한복판에 있었다. 600여 년 전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종각 옆 너른 들판에 세워졌다.
유교의 나라 도성 안 중심에 불교의 상징인 ‘원각사와 대원각사비’가 있다. 탑골공원은 600여 년 동안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수양대군 세조는 고려의 남경에 있던 흥복사라는 사찰을 증축에 새로운 절로 만들었다.
삼촌인 효령대군의 제안으로 회암사의 석가모니 사리를 가져와 사리탑을 쌓았다. 도성 안 가장 높은 탑을 세우니, 한양의 상징처럼 하얀 탑은 백탑(白塔)이라 부르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왕실의 안녕뿐이었을까? 아마도 조카 단종을 폐위하며 수많은 죽음에 미안함을 전했던걸까...
백탑이 있는 곳에 법당인 대광명전과 선당·운집당·해장전을 지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해탈문·반야문·적광문 3문을 세우고 커다란 종각도 지었다. 커다란 범종을 위해 전국에 동 5만 근을 모으도록 하였다.
원각사 범종이 숭례문으로 이전 후 다시 보신각 대종이 되어 파루와 인정에 종소리를 울렸다. 과연 원각사는 누가 지었을까? 전국에 수많은 사람과 도성 밖 백성들의 몫이었다. 원각사에 얽힌 슬픈 사연들은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만 알 수 있다.
50년 후 연산군은 원각사를 연방원이라는 기방으로 만들고, 흥청 200명의 대기실로 꾸며 ‘흥청망청’이라는 단어도 이곳에서 나오게 하였다. 기이한 일이다. 원각사 모든 법당과 건물은 없어지고, 한양의 상징 백탑만 남으니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최초의 근대식 공원을 만들고 싶었다. 탑골공원에 팔각정을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음악 공연을 열었다. 또한 1901년 창설한 대한제국 군악대는 음악회도 열었다. 매주 탑골공원에서 양악대의 관현악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한제국의 국가인 애국가도 이곳에서 들을 수 있으니,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이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낙원동(樂園洞)은 지상 낙원인 탑골공원이 있어 불리어진 동네다. 낙원상가에 전국 최대 규모의 악기종합상가가 있는 이유도 탑골공원 안에 군악대와 양악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 소리를 들으러 가 볼까요. 600여 년 된 대원각사비 아래 거북이가 미소 지으며 당신을 기다린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남서울예술실용학교 초빙교수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