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에 가면 퇴계 이황을 만날 수 있다
갑자기 내린 봄비에 나뭇가지 사이 꽃망울이 고개를 내민다. 비를 머금은 홍매화도 이제 곧 나올 듯한 날씨다. 쌀쌀한 새벽녘인데 빗방울은 차갑지 않다. 이제 봄이다. 남산도서관에서 목멱산 정상을 가는 길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이 보인다.
다산 정약용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 상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야 회현동에 처가가 있었고, 가장 오래된 도서관 옆에 있어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퇴계 이황 선생 상은 왜 이곳에 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본다.
남산도서관은 1922년 명동에 세워진 최초의 도서관인 ‘경성부립도서관’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성 안에 도서관을 세웠다. 누구를 위해 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해방 후 ‘남대문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꾼 후 다시 1963년 목멱산에 새롭게 짓고, ‘남산도서관’으로 불렀다.
그 당시 목멱산은 남산으로, 숭례문은 남대문이 더 익숙한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도서관이 도성 밖 후암동에 자리 잡았다. 목멱산 소월길을 사이에 두고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이 나란히 있다. 소월길 사이에 다산 정약용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이 학문을 닦는 벗이 되었다.
남산도서관 정문을 기준으로 동쪽에 퇴계 이황 선생이 부채를 들고, 서쪽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있다. 1970년 동상을 건립하여 서울 곳곳에 세웠다.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원효대사, 사명대사, 강감찬 장군, 을지문덕과 세종대왕까지 위인들의 동상이 많다.
퇴계 이황 상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소파로로 내려가면 명동역과 충무로역이다. 목멱산도 식후경이라, 소파로에 있는 맛집에서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작은 계단길에 따뜻한 커피는 현금으로만 판다. 오천 원을 주니 천 원을 거슬러준다. 오랜만에 보는 천 원권 지폐다.
커피가 나오기 전 천 원권을 유심히 살펴본다. 우연의 일치일까? 천 원짜리에도 퇴계 이황이 나를 보고 웃는다. 앞면에 보이는 곳은 성균관 명륜당이요, 매화 그림도 있다. 비를 머금고 홍매화가 이제 살짝 필 것 같다. 뒷면에 그려진 그림은 퇴계 이황의 고향인 안동 속 토계마을이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소나무 옆 독서당도 있다.
지폐 속 그림은 퇴계 이황의 초상화와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다. ‘인왕제색도’를 그린 겸재 정선이 하양 현감으로 있을 때 직접 가 보고 그린 그림이다. ‘계상정거도’는 냇가에 고요히 머문다는 뜻일까? 그림 속 책을 읽고 있는 선비도 보인다. 퇴계 이황이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천 원권 지폐를 보며 명동에서 광희문까지 걷는다. 이곳이 바로 퇴계로다.
한양도성의 남쪽 산, 목멱산에 가면 퇴계 이황을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천 원권에 퇴계 이황 초상화와 매화 그리고 도산서당이 숨어 있다. 그림 속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봄날 퇴계로가 그대를 기다린다. 매화향 가득한 그곳에 가고 싶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