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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방방곡곡(53)

발행일 : 2022-10-20 11:02:45
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방방곡곡(53)

사릉과 장릉은 이제 꼭 만나야 한다

해 뜨기 전 동쪽을 향해 나선다. 낙타산 너머 용마산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힘이 솟는다. 도성 안 흥인지문을 나서는 순간 창신동 언덕이다. 돌산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채석장이었다. 이 많은 바위와 돌들은 어디로 갔을까? 깍기고 깍인 바위산은 이제 집들로 둘러싸여 있다.

창덕궁에서 나선 발걸음은 흥인지문을 뒤로하니 어느덧 창신동에서 제일 높은 언덕배기다. 여기는 정업원이 있는 동망봉 자락이다. 누가 이곳에서 그토록 사람을 그리워했을까? 565년 전 어린 왕과 왕비가 마지막 밤을 뜬눈으로 보낸 후 영도교로 향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에서 부부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권력은 비정하다.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600여 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순간이다. 영도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물처럼 아무런 말이 없다.

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방방곡곡(53)

12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단종은 그냥 희생양이었다. 어린 왕과 어린 왕비는 그렇게 2년 6개월을 살았다. 신분도 여러 가지다. 왕에서 상왕으로 그리고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삶을 마감한다. 부인도 그렇다. 왕비에서 왕대비로 그리고 서인에서 비구니로 64년을 더 살았다.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뒷산이 절벽인 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소식도 전할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 그는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청령포에 유일한 벗은 소나무 한 그루 관음송 이었다.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 일어나 동망봉에 올라 동쪽을 보았다.

해 뜨는 곳 영월 청령포를 향해 문안 인사을 드렸다. 64년을 만날 수 없는 님에게 드리는 아침 인사였다. 살아서 왕에게, 죽어서는 능에 절을 했다. 슬픈 왕과 왕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사후 200여 년 후 신원이 회복되고, 복위 되어 묘호는 단종으로,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영월에 있다.

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방방곡곡(53)

그런데 치욕을 참고 살아간 정순왕후는 도성 밖 동망봉에서 82살까지 버텼다.이제 사릉(思陵)에 있다. 남양주 진건이다.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으면 사릉일까?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만날 수 없다. 왕과 왕비로 살아간 날보다 서인으로 살아간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565년 동안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영월에서 단종문화제와 종로에서 정순왕후 추모제를 지금껏 따로 진행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행사일까...

청년 단종과 약속을 지키려 해 뜨기 전 정순왕후 송씨가 있는 사릉으로 달려왔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왕릉을 걸으며 홀로 이야기한다. 영월 청령포 관음송 위 햇살이 남양주 진건 소나무에 비친다. 발걸음이 왠지 가볍다.

필자 소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 사무차장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자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저자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찾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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