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와 수표교 庚辰地平(경진지평) 어디에 있을까?
600여 년 전 도성 안 한복판에 개천(開川)이 있었다. 개천은 인공적으로 만든 도심 속 하천이었다. 도성 안 명당수와 생활 속 오수가 모인 하수도 역할을 동시에 하였다. 도성 안 개천은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뀐다. 인왕산 기슭 백세청풍 바위가 있는 청풍계천을 줄여 청계천이라 하였다. 한양도성을 둘러싼 내사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도성 안 빗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개천에 모였다. 개천 위 백악산을 중심으로 좌청룡 낙타산과 우백호 인왕산 계곡물이 흘러 흘러 가운데로 모였다. 또한 남주작 목멱산에서도 빗물이 흘러 빠르게 개천으로 왔다.
비가 많은 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나무로 된 다리는 모두 떠내려갔다. 청계천에 목교가 석교로 바뀌는 절대적인 이유다. 청계천에 가장 오래된 다리가 광통교(廣通橋)다. 경운궁 옆 정릉의 병풍석과 신장석을 파헤쳐 교각으로 만들었다. 광통교 지나면 수표교가 넓고 튼실하게 놓여 있었다. 청계천의 다리 가운데 수표교(水標橋) 서쪽에 수표가 있었다. 수표는 개천의 수심을 측정하는 기둥이다. 간단한 구조물이다. 하지만 600여 년 전 도성의 치수를 엿볼 수 있는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도성 안 백성들에게 중요한 다리요, 물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표시였다.
개천은 도성 안으로 모여드는 빗물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로였다. 1441년(세종 23) 물을 잘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 수표다. 수표를 설치해 개천의 수심을 쟀다. 측우기가 강수량을 재었다면, 수표는 물 깊이와 수량을 측정했다. 비 올 때 수심을 재어 보고하였다. 그러나 광통교와 수표교에 왕의 행차와 다리밟기등 큰 행사가 있었지만 개천 준설은 300여 년이 흘러 이루어졌다. 개천이 범람하는 일이 잦아 영조가 애민과 위민의 정책으로 준천사를 설치해 준설 대업을 하였다. 1760년(영조 36) 경진년(庚辰年)에 영조는 도성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관료들과 토론하여 준천 공사를 시행하였다. 1760년 도성 안팎 20만 여 명이 모여 57일 동안 준천을 하였다.
광통교와 수표교 교각에 그 흔적이 있다. ‘庚辰地平(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겼다. 공사의 완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네 글자가 항상 보일 수 있게 했다.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계속 준천을 후대 왕에게 당부한 따뜻한 마음이 숨겨있다. 광통교와 수표교를 걷다가 언제나 네 글자 앞에서 멈춘다. 260여 년 전 영조의 위민의 정치 철학을 만날 수 있어 훈훈하다. 또한 광통교와 수표교에 ‘癸巳更濬(계사갱준)’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경진지평을 쓴 후 13년 후 1773년(영조 49)에 대대적인 준천과 개천 석축 공사도 하였다. 그런데 광통교는 반쯤 된 모습으로 청계천에 있는데, 수표교는 장충단 옆 남소문동천에 온전하게 있다.
광통교와 수표교는 우리나라 과학 기술의 최고 산물이다. 또한 ‘庚辰地平(경진지평)’ 네 글자는 애민과 위민정책이 담긴 리더의 소통 현장임이 틀림없다. 나의 마음이 영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청계천은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
필자 소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 사무차장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자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저자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찾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