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 이제 마음에 드는 차로 가셔서 두 분씩 탑승하시면 됩니다. 두 바퀴를 돌고 나면 운전자를 교대 하시고, 다시 두 바퀴를 돈 다음에는 다음 차량으로 바꿔 타시는 겁니다. 그럼 여기 오신 분들 모두 행사가 끝날 때까지는 저희가 준비한 AMG 차들을 골고루 한번씩 운전해 보실 수 있겠지요?” 맙소사! 눈앞에는 세 꼭지 별과 AMG라는 세 글자를 붙인 500마력 급 차량들이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약한’ C 63 AMG마저도 최고출력은 457마력. 그런 차들이 물경 스무 대쯤 한자리에 모여있으니, 게다가 당장이라도 아무 차에나 올라타 운전해볼 수 있다니 과연 여기가 대한민국 맞나 싶었다. 하긴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가 남다르긴 했다. 진입로에서 행사장에 이르기까지 파란 물결을 일으키며 나부끼던 길고 긴 메르세데스-벤츠 깃발은 대체 몇 개였던가. 행사장에는 간이 세차장은 물론 상설이라고 거짓말해도 잠시 속을 것 같은 임시 정비소까지 세워져 있었다. 주최측에서 직접 동원한 방송장비와 지미집(원격조정 카메라 크레인)은 기자가 들고 갔던 가정용 캠코더를 민망하게 했다.
글 / 민병권 @ RPM9.KR 사진 /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민병권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는 10월 3일 금요일부터 5일 일요일까지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자동차 성능 시험 연구소에서 ‘AMG 드라이빙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이름처럼 벤츠의 고성능 버전인 AMG 차들을 운전해보고 올바른 취급법도 배워보는 행사이다. 이런 종류의 행사는 시간과 장소 등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대체로 그 내용이 뻔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진행되기 쉽다. 하지만 참가자의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차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차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골고루 타볼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비록 그것이 한정된 구간에서 시키는 데로만 움직여야 하는 교육생과 교재로서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이번 행사는 벤츠 중에서도 AMG 차량들로 특화되었다는 면에서 가산점을 부여할 수 있었다. 지난 해, 벤츠 코리아는 같은 장소에서 ‘액티브 세이프티 익스피리언스’ 행사를 개최했었는데, 그때는 보통의(?) 벤츠들을 통해 벤츠가 자랑하는 능동형 안전장치들의 효과를 체험하고 사고회피를 위해 필요한 안전 운전 요령을 익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당시도 유익하고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번에는 AMG라는 차의 성격상 조금이나마 스포츠 드라이빙도 체험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주최측은 날짜 별로 오전반과 오후반을 나누어 사전 신청자중 총 180명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는데, 기자는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일요일 오후반으로 배정되어 점심시간에 맞춰 행사장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이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주위를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는 사이, 오전반 교육을 막 끝마친 스텝들은 오후반 수업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량점검에, 기름 넣고, 타이어 바꾸고, 세차 하고… 분주하게 오가는 차들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연이 아니라 타이어가루였다. 아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수업은 독일에서 온 네 명의 강사소개와 간단한 이론교육으로 시작되었다. 지난 해 행사 때도 만난 적이 있는 마티아스 클라인미첼 씨가 이번에는 수석강사 자격으로 참석해 이론 수업을 해주었다. 올바른 운전자세와 슬라럼 또는 코너링시의 시선처리, 그리고 서킷에서의 바람직한 코너 통과 라인 등, 잊고 있었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짧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 눈길을 끈 것은 시청각 교재에 등장한 차량이 벤츠의 ‘SLR 맥라렌’이었다는 점. (이 수퍼카에 탑재되는 626마력짜리 5.5리터 V8 수퍼차져 엔진은 AMG에서 공급한다.) 이론교육을 마친 참가자들은 현장 등록 때 손목에 찬 수갑…아니 팔띠의 색깔 별로 조가 나뉘어 담당 강사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은색 팔띠를 찬 기자의 조는 유일한 여자 강사인 비올레타씨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활달한 성격과 미소, 참가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독려가 인상적이었다. 첫 시간에 타게 될 차량 역시 팔띠 색상을 따라갔다. 은색 띠는 은색 차, 흰색 띠는 흰색 차, 검정 띠는 검정 차. 일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색상에 맞게 대여섯 대씩 준비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실습에 앞서 실제 차량에서의 운전자세 교육이 다시 이루어졌고, 이어 몸풀기로 슬라럼 코스 주행을 하게 되었다. 슬라럼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CL 63 AMG였다. 금새 적응을 마친 참가자들이 점차 슬라럼 통과 속도를 높이자 다른 차들은 어쩔 수 없이 회전 방향 바깥쪽으로 차체가 쏠리는 롤을 일으켰지만, ABC의 제어를 받는 CL 63 AMG는 그 반대로 회전 방향 안쪽으로 차체를 숙여가며 안전콘 사이를 통과해 모터사이클의 거동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ABC는 Active Body Control을 뜻하는 벤츠의 능동제어형 서스펜션으로, SL과 CL등 일부 모델에 적용된다. AMG버전에서는 이 ABC를 기반으로 AMG만의 스포츠 서스펜션을 완성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이건 일정수준 이상의 안락성은 해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어째서 CL 63 AMG만 돋보였는고 하면, CL과 달리 SL 63 AMG는 고속주회로에만 배치되어 있었던 탓이다.)
은색조의 본격적인 교육은 ‘ESP ON/OFF 상태에서의 연속 급차선 변경’이라는 과목으로 시작되었다. 80km/h의 속도로 진입해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옆차선으로 자리를 바꿨다가 다시 본래의 차선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ESP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도록 스티어링휠은 몹시 급하게 조작해야 하고 브레이크 조작 없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 코스를 통과한다. 먼저 비올레타씨가 운전하는 CLS 63 AMG에 세 명씩 동승해 ESP를 끈 상태에서의 조작방법을 견학했고, 이어서 참가자들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같은 코스를 경험했다. 처음에는 ESP를 켜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끄고 달려보았다. 앞서 언급했던 전년도의 행사에서도 같은 과목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비교가 되었는데, 일반 벤츠들 -4륜구동인 ‘4매틱’버전들이 주종을 이루긴 했지만-로 비슷한 코스를 달렸던 그 당시가 진입속도는 100km/h로 오히려 더 높았다. 사실 일반 벤츠는 ESP를 꺼놓더라도 위기상황에서는 자동개입을 하기 때문에 그 속도에서도 안정적인 코스 탈출이 가능했었다. (사실 ESP가 달려있고, 켜놓았다고 해서 모든 차가 이러한 급차선 변경을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실제 상황에서 얼마나 매끄럽게, 얼마나 불안하지 않게 작동하는가는 메이커의 실력에 따라 수준 차이가 난다. 물론 어떤 경우에건 과신은 금물이다. )하지만 고성능 버전으로서 스포츠주행을 하고자 하는 운전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AMG의 ESP는 스포츠 모드 외에도 완전한 OFF모드가 있어 이를 선택하면 위험하든 말든 자동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운전자가 작정하고 ESP를 끈 상태라면 그 뒷감당도 운전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가자들은 그 뒷감당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급차선 변경으로 뒤가 ‘날아가는’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스티어링의 역방향조작(카운터 스티어)을 통해 이를 바로 잡게 되지만, 그 순간 다시 반대방향으로 튀는 차를 끝까지 원래의 진행방향으로 잡아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ESP를 끄자 안전콘들 위로 스텝을 밟으며 격렬한 댄스를 추는 차들이 속출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코스를 통과한 차들은 먼젓번 시도에서 시동이 꺼졌던 탓에 ESP가 다시 켜진 줄 모르고 진입한 경우였다. 미리 준비된 환경에서 조작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실제 사고직전에서의 상황이라면 오죽할까. 그와는 별개로 ESP의 도움 없이도 비올레타씨처럼 이런 코스를 잘 통과할 수 있게 된다면 그에 대한 성취감은 클 것이었다. 정비팀 스텝들은 손수 만든 점수판으로 참가자들의 ‘의도하지 않은 묘기운전’을 평가해주었는데, 요란하게 스핀하며 나가떨어질수록 높은 점수가 나와 행사의 흥을 돋우었다. 물론 강사인 비올레타씨가 평가하는 점수는 그와 반대였겠지만 말이다.이번에도 남다른 몸놀림을 보여준 것은 CL 63 AMG였다. 기자는 분명 ESP를 끄고 진입했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ESP의 개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ABC의 효과였다. 도어를 살짝만 닫아도 자동으로 끝까지 닫아주는 소프트 클로징 기능이나 코너링시 바깥쪽 옆구리를 부풀려주는 다이내믹 컨투어 시트, 사고징후가 감지되면 안전벨트를 조여주는 프리세이프 기능 등 CL의 럭셔리함은 참가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두 번째 코스는 고속주회로 주행. 성능시험연구소에서 진행된 행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참가자들에게 직접 운전 기회가 주어졌고, 이번에도 운전자와 차량을 교대해가며 마음껏 타볼 수 있었다. 지난 해에는 SLK 350을 타고 이곳에서 260km/h까지 달렸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운전석은 강사들의 차지였다.
사실 코너에서 상당한 횡방향 경사(뱅크)를 만나게 되는 고속주회로는 일반적인 주행환경과 다르기 때문에 막상 운전대를 잡고 달려보면 겁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도 하는데, AMG는 –적어도 기자가 탔던 ML 63 AMG는 – 전혀 그런 부담을 느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200km/h라는 속도도 맨송맨송하게만 여겨졌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것은 그 뱅크 중간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 도어를 여는 일이었다. 속된 말로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아무튼, 참가자들은 고속주회로의 경사면 위를 직접 걸어보는 색다른 체험 시간도 가졌다.
하지만 가장 AMG다웠던 코스는 기자의 조가 마지막으로 체험한 핸들링 퍼포먼스 코스였다. 비록 맨땅에 안전콘만 세워 만든 것이긴 했지만 서킷의 축소판처럼 꾸며진 코스를 AMG차들로 신나게 달려볼 수 있었다. 헤어핀-오메가 구간에는 급수차로 물을 뿌려놓아 좀더 다이내믹한 거동이 나오도록 하기도 했다. ML 63 AMG는 어쩔 수 없이 뒤뚱거리는 모습이었고, CL 63 AMG의 ABC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에 슬라럼 때 위화감을 주었다. 최신작인 C 63 AMG는 상대적으로 작은 덩치이면서도 가장 우렁찬 배기음을 뽐냈다. 이날 SL 63 AMG가 고속주회로에 묶여있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았던 차량은 바로 이 C 63 AMG가 아니었나 싶다. 반면, 기자의 미천한 운전실력으로 안전콘 사이의 좁은 통로를 가장 부담 없이 내달릴 수 있는 차는 아이러니하게도 SLK 350이었다. (행사장에는 세이프티카 자격으로 몇 대의 SLK 350이 배치되어있었고 참가자들도 운전해볼 수 있었다.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SLK 55 AMG는 행사장에 없었다.)
하이라이트는 강사가 운전하는 C 63 AMG 또는 CLS 63 AMG에 동승해 이 코스를 전력 질주하는 택시 드라이빙 시간이었다. 강사들은 ESP를 끈 상태에서 꽁무니를 자유자재로 날리며 현란한 운전실력을 뽐냈다. 겉보기에 멋진 드리프트가 연출되는 사이 실내에서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던 운전자의 손발 조작은 백조의 물장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번 행사에 동원된 AMG 차량들은 SL 63 AMG, CL 63 AMG, CLS 63 AMG, ML 63 AMG, C 63 AMG로, 모두 국내에 정식 수입되는 모델들이다. 가격대는 2008년 10월 현재 9천1백9십만원(C 63 AMG)에서 2억9백만원(CL 63 AMG)사이에 걸쳐있다. 정규 AMG모델은 아니지만 S500L과 SLK 350에서는 AMG스포츠 패키지를 선택해 ‘보통 벤츠’와의 외관상 차별화를 꾀할 수 있기도 하다. 사실 AMG에서 만드는 정규 모델은 한정판을 제외하고도 CLK 63 AMG, E 63 AMG, SL 65 AMG, SLK 55 AMG, S 63 AMG등 십여 가지가 더 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이미 다섯 가지나 국내에서 정식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수입차 시장이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얘기다.
‘Power & Passion’이라는 주제로 펼치졌던 이번 행사는 메르세데스-벤츠에서 AMG가 갖는 의미와 그 매력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느 여성 참가자는 “다른 드라이빙 스쿨 때랑은 다르게 참가자의 기를 죽이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고 총평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