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카이만(caiman)’으로부터 이름을 따온 포르쉐 카이맨(Cayman)은 2005년 말, 로드스터인 2세대 박스터의 쿠페 버전으로 처음 등장했다. 신형 911에 이어 DFI 엔진과 PDK 변속기를 적용 받은 박스터가 2.5세대 모델이라면, 이번에 처음으로 페이스리프트된 카이맨은 1.5세대 모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11의 옥체보존을 위해 항상 눌림목 속에 사는듯했던 카이맨은 이번에야 비로소 숨겼던 칼을 빼들었다.
글/ 민병권 (www.rpm9.com 에디터)
사진 / 박기돈 (www.rpm9.com 편집장)
시승차를 받으러 분당의 포르쉐 센터에 갔다가 화장실에 들르게 되었다. 일행이 “여기 화장실은 몇 인승이야?”하고 묻기에 폭소를 터뜨리며 확인해보니 대변기가 2개, 소변기가 2개. 말하자면 2+2인승이었다. 포르쉐의 대표차종인 911이 바로 2+2의 좌석배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여자화장실은 몇 인승인지 미처 확인해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이번 시승차인 카이맨은 박스터와 마찬가지로 2인승이다. 국내에서는 이로 인해 골프 백을 싣기가 불편해서 911보다 덜 팔린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만큼 스포츠카의 본질에는 더 가까운 차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뒷좌석이 없는 대신 엔진을 운전석 바로 뒤에 놓음으로써 뛰어난 무게배분과 핸들링으로 달리기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졌다.
애초에 로드스터로 탄생한 박스터와 달리, 고정식 지붕구조를 통해 차체강성을 비약적으로 높인 카이맨이 911을 위협하는 ‘위아래도 모르는 동생’으로 부상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카이맨의 잠재력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높아질수록 카이맨의 성능을 매만지는 포르쉐의 손길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당초 카이맨의 고성능 버전인 ‘S’를 먼저 출시하면서 박스터 S보다 최고출력을 15마력 높게 설정해 박스터의 윗급 모델임을 강조했던 포르쉐는 2007년형 모델부터 박스터와 카이맨의 출력을 동일하게 맞춤으로써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라이벌들과의 경쟁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박스터가 나날이 성장해가면서 이전 세대 911의 영역을 야금야금 침범해 들어갔듯이, 이번 카이맨도 외관상으로는 램프류와 범퍼를 손질하는 정도의 변화를 거쳤을 뿐이지만 엔진과 변속기가 ‘새로운 시대의 물건’으로 바뀌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변화의 핵심은 물론 911에 먼저 적용된 직분사 방식(DFI) 엔진과 PDK(Porsche Doppelkupplung) 변속기의 이식. 그런데, 이 두 가지 신기술의 혜택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은 박스터든 카이맨이든 ‘S’자 붙은 모델들만의 특권이다. 기본형 박스터/카이맨은 배기량이 종래의 2.7리터에서 2.9리터로 확대되었지만 분사방식은 그대로 남겨뒀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스터 S/카이맨 S의 배기량은 3.4리터로 종전과 동일하다. 하지만 정확한 배기량은 3,387cc에서 3,436cc로 늘어났다. 단순히 분사방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911과 마찬가지로 블록 채 새로 개발한 엔진이기 때문이다.
카이맨 S의 최고출력은 이전보다 25마력이 높아진 320마력이고, 이것이 발휘되는 회전수 역시 6,400rpm에서 7,200rpm으로 찌릿찌릿하게 높아졌다. 같은 엔진을 적용한 박스터 S와 비교해도 10마력이 더 높은 카이맨 S의 최고출력은 페이스리프트 이전의 911 카레라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DFI로 진화하기 전, 997 카레라의 3.6리터 엔진이 325마력을 냈었으니 말이다.
최고출력뿐 아니라 0-100km/h 가속에 있어서도 이번 카이맨 S는 상징적인 고지를 점령했다. PDK 변속기와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플러스’를 적용한 경우 0-100km/h 가속을 4.9초, 즉 5초 미만에 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전의 997이, 카레라도 아니고 카레라 S가 0-100km/h 가속에 5.3초가 걸렸었음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911은 이 수치를 4.3초까지 떨어뜨린 상태이므로 카이맨과의 간극은 확실하게 벌려두고 있다.
시승차가 바로 카이맨 ‘S’이고, PDK가 달려있으며,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플러스 또한 추가된 상태였다.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플러스는 단순히 랩타임을 측정할 수 있는 멋진 시계가 대시보드 상단에 추가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패키지가 빠진 카이맨 S PDK의 0-100km/h 가속시간은 5초를 살짝 넘긴다. 4초대 진입이 가능해진 것은 여기에 포함된 급출발 보조장치-론치컨트롤의 힘인 것이다.
그렇다면 테스트해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차를 정차시킨 뒤 센터페시아 가장 밑줄에 있는 스포츠플러스(SPORT PLUS) 버튼을 누른다. - 물론 스포츠 플러스 모드가 이미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라면 다시 누를 필요는 없다. - 계기판에서 스포츠플러스 모드의 활성화를 확인한 뒤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고 변속레버를 D에 둔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는다. (아, 브레이크는 왼발로, 가속페달은 오른발로 밟는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재빠르게 옮겨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삑~ 하는 경고음과 함께 계기판에 ‘Launch control active’라는 문구가 뜨면서 엔진회전수가 6,700rpm에 고정된다.
그 다음은? 브레이크 페달에서 왼발을 떼는 순간 헤드레스트가 뒷통수를 가격한다. 끼기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주행안정장치인 PSM이 타이어의 미끄러짐을 제어하고, PDK는 최대의 가속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순간에 전광석화와도 같은 변속을 행한다. 엔진 회전수가 7,400rpm을 넘기면서 한차례 변속이 이루어졌는가 싶더니 속도계는 벌써 100km/h를 넘긴 상태. 55km/h에서 2단으로 바뀐 다음, 변속 없이 100km/h를 넘기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귀를 멍하게 하는 공명음이 혼을 쏙 빼놓는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번에는 강력한 성능의 브레이크가 타이어를 위협한다. 앞 235/40ZR18, 뒤 265/40ZR18사이즈의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는 깨개갱하는 단절음과 함께 차를 바닥에 꽂을듯한 감속을 버텨낸다.
듀얼클러치 방식 변속기인 포르쉐의 PDK는 911과 박스터/카이맨 모두 7단의 구성을 갖고 있다. 폭스바겐 그룹의 DSG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뒤 911에 처음 적용돼 나왔기 때문에 한발 늦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포르쉐는 이미 1980년대에 962 그룹C 경주차에 PDK를 달아 실전에 투입했었다.
PDK의 변속특성은 스포츠 모드, 스포츠 플러스 모드로 넘어갈수록 더 과격해진다. 일반모드에서는 승차감을 고려해 변속충격을 최소화하는 대신 동력전달과 시간상의 손실을 감수한다면, 스포츠플러스 모드에서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이다. 스포츠플러스 모드에서는 변속기뿐 아니라 가속페달 입력에 대한 반응도 날카로워지고, 옵션사양인 PASM(포르쉐 어댑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도 스포츠 모드로 자동 전환되면서 하체가 더욱 단단해진다.
스포츠플러스와 PDK, 그리고 DFI의 매력을 좀더 느껴보기 위해 7단에서 80km/h를 유지했다. (일반모드에서는 속도가 67km/h 이상이면 7단에 들어간다.) 이때 회전수는 1,400rpm 정도. 스포츠 플러스 버튼을 누르자 기어가 5단으로 바뀌면서 회전수가 2,200rpm으로 상승했다. 전방 도로가 비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냅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기어가 2단에 들어가면서 회전수는 5,500rpm으로 치솟고, 다시 아까처럼 헤드레스트가 뒤통수를 가격하는 가속이 시작됐다.
우우웅~철컥, 우우우웅~철컥, 우우우우웅~ 105km/h에서 3단, 150km/h에서 4단, 190km/h에서 5단, 240km/h에서 6단을 찍으면서도 가속감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레드존을 치고 내려올 때의 황홀한 흥분감에 빠져들고 나면, 말 그대로 ‘풀 슬로틀’ 상태인 오른발에서 힘을 빼기가 어려워진다. 정신이 더 아득해지기 전에 속도를 줄여야 했지만, 계기판은 이미 6단 6,600rpm에서 270km/h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저승 문턱에 다녀온 듯 했다.
최고속도를 찍어보겠다는 마음을 먹을 만큼 긴 구간이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카이맨 S는 너무나도 쉽게 275km/h라는 제원상 최고속도를 확인시켜줄 기세였다. 방법이 없었다. 그 즉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카이맨 S에게 투항했다.
원래 카이맨은 눈밖에 내놓은 차였다. 박스터도 좋고 911도 좋지만 카이맨 만은 싫었다. 박스터에 어색하게 지붕을 덧씌우고 억지로 차별화를 시키면서 비롯된 못생긴 겉모습이 데뷔 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든 탓이다. 사실 신형 카이맨 S의 황홀한 달리기 실력은 전날의 와인딩 코스 주행을 통해 이미 확인한 뒤였다. 하지만 ‘카이맨 S가 더 잘 달리더라도 나라면 박스터나 911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카이맨S가 보여준 상상이상의 ‘직발’ 성능은 마치 필자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는 뒤통수를 때려가며 재고를 강요하는 듯 했다.
“그래, You win!” 미운 악어 새끼가 체험시켜준 원초적인 달리기 경험은 다른 개구리들이 선보였던 매력을 희석시킬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시승했던 911 카레라S나 타르가4S는 물론 신형 박스터 S와도 구분되는 것이었다. 격벽과 덮개만을 사이에 두고 운전자 바로 뒤에서 윽박지르는 카이맨의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은 패스트백으로 뻗은 해치게이트와 둥그런 지붕에 사운드를 반향시켜 그 자극적인 소리를 고스란히 운전자의 몫으로 만든다.
엔진은 저 너머에 있지만 열어서 보여줄 수가 없다.
물론 이 사운드의 유효성은 7,000rpm을 넘길 때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 줄을 놓게 하는 고회전에서의 소리와 달리 두드드드 하고 가슴을 울리는 포르쉐 노트는 극히 낮은 회전수에서도 엔진 부하와 가속페달 개도에 따라 멋진 음악을 들려준다. 마치 고가의 독일제(핀란드산*) 명품악기에 올라타 오른발로 즉흥 연주를 하는 기분이다.
*박스터,카이맨은 핀란드의 발메社(Valmet Automotive)에서 위탁생산되고 있다.
저속주행시 PDK는 일반모드에서도 가끔씩 툴툴거리는 반응을 보인다. 주행소음이나 진동을 애써 감추지 않는 차량인 만큼 그 강도는 승용차와는 다른 수준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이처럼 훌륭한 성능을 체감시켜주면서도 일상생활에 쓰기에 아무 무리가 없는 편리함을 제공하는데 뭘 더 바랄까.
지난 번의 박스터S 시승차와 달리 풀 오토 에어컨과 쿨링 시트가 적용되었다.
오디오의 AUX/USB/아이팟 입력단자는 센터암레스트 안쪽에 있다.
확실히, 과격한 주행을 하고 나면 연료게이지가 성큼성큼 떨어지고 몸도 쉽게 피곤해지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는 크루즈 컨트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100km/h 정속 주행시의 회전수도 1,800rpm을 하회하니, 비교적 편안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PASM의 설정을 일반모드에 맞춰놓으면 어지간한 도로 보수흔적도 참고 견딜만하다. (PASM의 스포츠 모드는 시내주행이 버거울 정도로 통통 튀고, 고속주행 시에는 도로상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
하기야, 욕심에 한이 있겠는가. 기왕이면 스티어링 휠에 오디오 리모컨도 있으면 좋겠고, 오토헤드램프와 와이퍼도 있으면 좋겠지. 사이드미러도 전동으로 접히면 좋겠고… 어처구니 없는 발상만은 아닌 것이, 이번 카이맨은 쿨링 시트에다 터치스크린 방식의 PCM(포르쉐 커뮤니케이션 매니지먼트)까지 장비하고 나타나 정신적 해이를 부추긴다. 911이 스포츠카 중에서도 고성능 GT를 지향한 차라면, 카이맨은 좀더 순수 스포츠카에 가깝다. 기왕 911을 위해 개발한 편의사양이니 카이맨이나 박스터에도 나눠주고는 있지만, 편안해지려는 생각을 경계할 지어다.
시승차는 화장을 하다 말고 나왔다.
범퍼 아래쪽과 사이드 미러 하단을 은색으로 칠했는데,
측면에는 이에 어울리게 영문 카이맨S로고가 추가될 예정이란다.
사이드미러는 구형보다 살짝 커져 후방시야를 개선했다.
헤드램프와 LED 테일램프 디자인은 신형 박스터와 같다.
박스터와 차별화된 앞범퍼 흡기구의 원형 램프는 안개등이 아니라 LED 주간주행등이며,
안쪽의 가늘고 긴 LED 램프는 미등의 역할을 한다. 안개등은 사라졌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가 이름처럼 악어의 그것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시승차는 파란 상어를 보는 듯 했다.
아가미도 어떻게 좀 미화시킬 수 없을까?
18인치 휠은 작고 못생겨 보인다.
헬멧을 고려한 듯 둥글린 지붕에는 선루프가 장착될 수 없다.
시승차의 내장 마감에는 악어를 연상시키는 가죽패턴이 사용되었다.
진짜 악어가죽이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멋부린 주차브레이크 장식(옵션)이 적용되었지만 꾸밈없는 조작감은 여전하다.
내장 일부가 차체색상으로 도색된 것은 익스클루시브 옵션.
조명이 켜지는 도어 스커프도 마찬가지다.
시트는 등받이 각도만 전동식으로 조절되고 높이와 거리는 수동조절식이다.
박스터와 달리 엔진 위로도 수납공간이 있어서 총 260리터의 후방 적재공간이 확보된다.
메탈장식으로 위아래 적재공간을 구분해 박스터보다 고급스럽게 보인다.
트렁크를 닫을 때는 살짝 덮은 뒤 꾸욱 눌러 잠기도록 해야 한다.
전방 트렁크에는 박스터와 동일한 150리터의 적재공간이 있다.
엔진덮개 양쪽으로는 스피커와 뚜껑 달린 추가 수납공간, 그리고 실내등이 마련되어 있다.
‘화물의 습격’을 막을 수 있도록 그물망과 안전바가 마련되어 있지만,
더욱 완벽한 격리를 원한다면 옵션사양으로 철망 격벽을 추가할 수도 있다.
박스터와 달리 계기판 윗부분이 망으로 덮여있어서 얼핏 직물마감처럼 보이는 그림자를 만든다.
스티어링휠의 변속버튼은 누르면 시프트업, 당기면 시프트 다운이 된다.
볼 때마다, 조작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카이맨’의 유래, 왜 카이맨인가?
카이만(caiman)은 ‘악어목 앨리게이터과 카이만아과’에 속하는 악어의 총칭으로, 대체로 작고 유연하며 민첩한 악어들이다. 포르쉐는 이러한 카이만들의 특성이 911과 박스터의 틈새를 메우는 카이맨(Cayman)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작은 규모로 재빠르고 명석하게 움직이는 자동차회사로서의 포르쉐와도 부합한다고 판단해 이 이름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카이맨 S가 처음 출시되던 2005년 11월 26일, 포르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스투트가르트 본사 인근의 빌헬마 동물원과 카이만 네 마리에 대한 ‘입양’ 협약을 체결했다. 수컷 한 마리와 암컷 네 마리로 구성된 ‘넓은 입 카이만’ 네 마리를 5년 동안 뒷바라지하기로 하고 당시 금액으로 1만유로의 후원금을 약속한 것이다. 이 카이만은 브라질, 우루과이 등 중남미의 강과 늪에 사는 멸종위기의 악어이다.
에디터 / 민병권 @ www.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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