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를 열고 시트에 앉으면 소리 없이 뛰고 있는 짐승의 심장을 발견할 수 있다.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심장을 살짝 눌러주면 마침내 짐승의 진짜 심장이 잠에서 깨어난다. 숨어 있던 변속기 다이얼이 솟아 오르면 짐승은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다.
글, 사진 : 박기돈 (rpm9 팀장)
여기까지는 기존 XF와 다들 바 없다. 다만 그 심장이, 그리고 하체가 일반 재규어와는 다른 야생 재규어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여느 맹수가 그렇듯이 평상시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강자의 여유가 배어있다. 호랑이가, 사자가, 아니면, 재규어가 평상시에 촐랑대면서 뛰어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사냥감을 정하고, 먹이를 향해 달려 나갈 땐 그야말로 공포의 그림자로 돌변하는 것처럼, 오늘 만난 재규어 XFR은 여유와 파워를 함께 가진 진정한 야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파란색 재규어 한 마리 몰고 가세요. 하지만 정말 정말 조심하셔야 돼요. 화가 나면 아주 사납거든요.”
재규어 홍보 담당자의 당부와 함께 진짜 야수 XFR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짐승과의 교감에서는 첫 대면이 중요하다. 제압할 것인가, 제압당할 것인가가 첫 대면에서 결정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란색 재규어 XFR의 멋진 자태에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하늘처럼 파랗지 않고 깊은 바다처럼 파란색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XFR은 제압하고, 통제하고, 그리고 성능을 끌어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교감하는 관계가 되면 좋겠다.
외관에서부터 XFR은 짐승의 모습을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범퍼 아래 크게 뚫려 있는 공기 흡입구다. 좌우 흡입구에 드러내 놓고 있던 은색 이빨은 감추고 크롬링을 두르고 검정색 그물망으로 막았다. 이것은 재규어 R 모델들의 특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보닛 위에는 두 개의 공기 흡입구를 새로 뚫고 ‘SUPERCHARGED’라고 새겼다.
옆모습에서는 휠 하우스를 가득 채우는 트윈 7-스포크 네비스 20인치 대형 알로이 휠이 맹수의 발톱 마냥 날카롭다. 스포크 사이로 비치는 캘리퍼에도 R로고를 더했다. 뒷모습에서는 고속 안정성을 높여주는 스포일러가 트렁크 끝 부분에 살짝 솟아 올라 있는데, 왠지 좀 더 과격한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릴 것처럼 느껴진다. 범퍼 아래 좌우 배기구에는 각각 두 개씩의 파이프를 뽑아내 배기를 원활하게 하면서 멋진 스타일도 제공한다.
이안 칼럼이 빚어낸 새로운 재규어 스타일은 신형 XJ의 등장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쿠페를 닮은 늘씬한 자태는 눈으로 바라보기에도 돋보이지만 세차를 하면서 손 끝으로 읽어 내려간 루프 라인의 아름다움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XF는 뒷모습을 비스듬히 바라볼 때 가장 멋지다. 그 속에는 애스턴 마틴의 모습도 담겨 있다.
실내도 큰 차이는 없다. 갈색 우드 그레인이 짙은 참나무 베니어로 바뀐 정도가 우선 눈에 띄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강력한 성능에 어울리는 시트를 갖춘 것이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라고 하겠다. XFR에는 사이드 볼스터를 키우고 거기에 공기를 집어 넣어 부풀려서 몸을 조여 주는 기능과 방석 부분 길이를 조절하는 기능이 추가된 스포츠 시트가 적용되었다. 등받이 상단에는 ‘R’로고가 새겨져 있다. 통풍 기능이 있는 것은 일반 XF와 같다.
R로고는 스티어링 휠과 글로브박스 위 데시보드 등에도 부착되어 있고, 모니터가 켜질 때도 등장한다. 계기판에는 ‘SUPERCHARGED’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냥 로고 수준이 아니라 적어도 스티어링 휠이나 계기판 정도는 퍼포먼스에 어울리는 스포츠 타입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공조장치가 켜지면 180도 회전하면서 열리는 통풍구라든가, 영국 전투기의 휘장을 닮은 동심원 부분에 손가락을 접촉만 하면 열리는 글로브박스, 역시 센서에 의해 부드러운 터치로 작동되는 실내등, 센터 페시아 버튼들 사이로 은은히 베어 나오는 푸른 배경 조명 등은 여전히 신선하고, 아이팟과 연동되는 강력하고 섬세한 B&W(Bowers & Wilkins) 오디오 역시 매력적이다.
XFR에는 강력한 최신형 엔진이 장착되었다. 기존 R 모델들과 수퍼 V8에 얹히던 V8 4.2리터 수퍼차저 엔진은 적용되는 모델에 따라 400마력 혹은 420마력 정도를 발휘했었는데, 재규어는 더욱 강력한 파워를 위해 배기량을 5리터로 키우고, 첨단 6세대 트윈 보어텍스 시스템(TVS) 수퍼차저를 탑재하면서 직분사 시스템을 더해 최고출력 510마력/6,000~6,500rpm과 최대토크는 63.8kg.m/2,500~5,500rpm를 끌어냈다.
정밀 고압 주조된 알루미늄 엔진 블록과 주철 라이너, 재활용된 알루미늄으로 만든 헤드 등으로 구성된 신형 엔진은 배기량이 더 커졌음에도 전체 길이가 오히려 24mm 줄어 들었다. 직분사 시스템은 연료를 최대 150바의 압력으로 실린더 안에 쏘아준다. 토크에 연동되는 가변 캠샤프트 타이밍 시스템(VCT)와 가변 흡기 매니폴드(VIM)도 마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과거 BMW E39 M5가 V8 5리터 400마력이던 시절에는 400마력이 이런 퍼포먼스카들의 성능 기준이 되었다면, 현재의 E60 M5가 507마력이 되면서 다른 메이커들도 모두 500마력 이상으로 상향 조정이 되었다. 재규어도 XFR을 통해서 M5보다 3마력이 더 높은 엔진을 선보이고 있다.
변속기는 전형적인 자동 6단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 다단화 혹은 듀얼 클러치 변속기 채용이 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발전이 느린 듯 느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변속이 매끄럽고, 회전수 보정이 정확해 XFR을 타고 있는 동안 아쉬움을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다이얼을 돌려 변속기를 D로 옮긴 후 풀 악셀링을 하면 60, 110, 170, 230km/h에서 각각 변속이 이루어진다. 5단 5,800rpm 부근에서 계기판 상으로 약 264km/h 정도를 기록한 후 가속이 제한된다. 그야말로 파워풀한 가속을 즐길 수 있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출발 가속에 비해 중속 이상에서의 가속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제원상 0~100km/h 가속에는 4.9초가 걸린다. 4.9초면 아주 강력한 가속력임에 틀림없지만, 최근 기술의 발달과 함께 과거 4초 대를 달리던 수퍼카들이 3초 대로 가뿐하게 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510마력에 4.9초는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200km/h를 통과하고, 260km/h까지 이르는 과정은 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기대보다 훨씬 더 일찍 그 제한 속도까지 도달한다.
지난 해 1월 재규어는 XFR이 재규어 사상 최고 속도인 363.188km/h를 기록했다고 발표했었다. 이는 재규어의 전설적인 스포츠카 XJ220을 능가하는 실력일 뿐 아니라, 엔초 페라리의 350km/h나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LP640의 340km/h보다 더 빠른 실력이다. 최고속도를 10km/h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지를 알기에 XFR의 363km/h는 경이로운 속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빠른 달리기 실력을 갖춘 만큼 XFR만이라도 속도 제한을 풀어주는 것이 어떨까? 최근에 XKR에는 속도제한을 280km/h까지 상향 조정한 스피드 팩이 출시되었지만 그것으로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실제로 260km/h까지 도달해 내는 실력을 확인한 결과 XFR의 속도 제한을 푼다면 가볍게 300km/h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어 볼 것은 최고속도를 조금 줄이고, 0~100km/h 가속력을 좀 더 키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300km/h를 넘는 초 고속 영역은 평소에 쉽게 즐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제로백 성능은 쉽게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로백 0.1초 줄이는 것이 최고속도 10km/h 늘이는 것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XFR의 승차감은 비교적 단단한 편이다. 일반 XF도 예전 재규어들에 비해서는 많이 단단한 편이지만 XFR은 강력한 성능에 걸맞은 탄력을 확보하고 있다. 노면의 진동들이 조금은 걸러진 둔한 느낌으로 올라오지만 빠짐없이, 그리고 꽤나 강하게 전달된다. 재규어가 이렇게 단단해도 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M5 등과 비교하면 재규어 다운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다. 이 부드러움은 초고속 영역에서조차도 안락함으로 다가온다. XFR에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라는 새로운 전자 장비가 도입되었는데, 차체의 움직임을 초당 100회, 휠의 위치는 초당 500회 분석하여 노면과 주행 상황에 맞게 댐핑 강도를 자동으로 조절해 준다. 이러한 전자 장비의 도움으로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안락함을, 코너링에서는 뛰어난 안정감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XFR은 와인딩에서도 하드한 수퍼카에 비하면 코너에서 차체가 기울어지는 롤은 어느 정도 허용하지만 기대 이상의 그립을 확보하면서 짜릿한 코너링을 선사한다. 슬로우 인, 패스트 아웃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주행하되, 코너를 빠져 나올 때 엑셀을 조금만 과격하게 밟으면 강력한 수퍼차저 엔진의 토크가 뒷 바퀴를 몰아 부치면서 쉽게 오버스티어가 발생한다. 하지만 XFR을 통해 처음 도입된 ‘ADC(액티브 디프렌셜 컨트롤)’은 뒷바퀴 좌우 휠에 전달되는 구동력을 필요에 따라 조절해 주는 장치로 언더 스티어나 오버 스티어를 효과적으로 제어해 보다 안정적이고 다이나믹한 코너링을 연출해 준다. 거기다 최후에는 ESP가 버티고 있어서 XFR의 코너링은 좀 더 대담해지고, 결과적으로 속도는 한층 더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BMW ‘M’, 메르세데스-벤츠 ‘AMG’, 그리고 아우디의 ‘S’와 ‘RS’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퍼모먼스 모델 시장에서 재규어 R은 아직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하지만 XFR은 그냥 자리를 채우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들을 위해 잘 준비된 모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주 빠르고 정교하지만 여유가 부족한 M5, 대 배기량의 여유와 파워에 존개감을 갖추었지만 예리함이 아쉬운 E63 AMG, 콰트로로 무장한 S6와 RS6, 이들 가운데 이제 우아한 보디라인과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탁월한 빠름이 돋보이는 재규어 XFR이 당당히 자리매김 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