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엔 터보도 영락없는 포르쉐의 터보다. 포르쉐의 터보 배지에 걸맞는 화끈한 성능을 보여준다. 280km/h 이상까지 올라가는 속도계의 숫자를 보면 SUV가 맞나 싶을 정도다. 전방의 풍경이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도 여전하다. 그러면서도 모든 동작에는 세련미가 더해졌고 연비도 좋아졌다. 굳이 단점을 찾자면 자극적인 맛이 조금 희석됐다는 정도다.
글/ 한상기 (rpm9.com 객원기자)
사진/ 박기돈(rpm9.com 팀장)
포르쉐 뉴 카이엔 터보의 시승기를 쓰기에 앞서 과거의 시승기를 들춰 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다. 몇 년 만 지나도 기억이 가물한데 카이엔처럼 모델 체인지 주기가 길면 더 그렇다. 이전 모델의 시승기를 다시 찾아보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폴더의 폴더를 뒤적거려보니 2003년 12월에 카이엔 터보가 있다. 이렇게 오래 됐었나? 본인 시승기를 보는 건 좀 민망하지만 정독해 읽어보니 카이엔 터보의 성능에 놀랐던 나를 발견한다. ‘맞아. 이때는 카이엔 정도만이 SUV로서 이런 성능을 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 고성능 SUV의 바람이 불었지만 경기 침체가 불어 닥치면서 소강 상태이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독일 브랜드의 모델만이 남았을 뿐이다.
카이엔이 개척한 수퍼 SUV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지금도 이 장르에서 경쟁하는 차종은 손에 꼽는다. 그나마 카이엔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모델은 X5 M, ML 63 AMG, 그랜드 체로키 SRT8 정도다. 그만큼 카이엔은 소수를 위한 장르에 속해 있다. 그리고 진입 장벽이 가장 높은 장르 중 하나이다.
소수를 위한 장르라고는 하지만 요즘의 트렌드를 무시할 순 없다. 뉴 카이엔 역시 성능과 연비가 동시에 좋아졌고 하이브리드 버전까지 추가됐다. 전반적인 엔진 효율의 상승과 8단으로 업그레이드된 변속기도 빼놓을 수 없다. 구형은 S부터 나왔는데 이번에는 화끈한 터보 먼저 탔다.
신형 카이엔은 커지고 날카로워졌다. 커졌는데 스포티한 모습으로 바뀐 것도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친환경 트렌드와는 별도로 차의 스타일링은 점점 스포티하게 바뀐다. 카이엔도 스포티하면서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형은 지금 봐도 괜찮은 스타일이지만 신형은 세련미가 넘친다. 새 것이 반드시 좋으리란 법은 없기에 뉴 카이엔의 디자인은 꽤 잘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전면의 디자인은 최근 포르쉐의 요소가 적용된다. 구형이 다소 머슬적인 느낌을 강조했다면 신형은 날씬한 보닛 때문인지 우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런트 엔드의 전반적인 요소도 파나메라의 느낌이 물씬하다. 커다란 인테이크는 포르쉐 터보 모델의 특징이다. 카이엔 터보도 예외는 아니어서 3개로 분할된 인테이크가 강한 인상을 주도하고 있다. 양 인테이크 상단에 붙은 LED도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 사이드 미러에 방향 지시등이 없는 건 특이하다. 대신 헤드램프와 가깝게 펜더 상단에 붙어 있다.
신형 역시 SUV라 하기에는 납작하고 와이드하다. 특히 리어 뷰는 대형 왜건을 연상케 할 정도다. 빵빵한 엉덩이가 낮게 내려 앉아 있다. 카이엔 터보 정도면 머플러 4발은 기본이다. 성능에 비해 머플러 구경이 그리 크진 않다. 터보 배지는 해치 게이트에만 붙어 있다. 눈치 없으면 그냥 카이엔인 줄 안다.
타이어의 사이즈는 295/35, 휠은 무려 21인치이다. 휠, 타이어 사이즈만 보면 911 터보다. SUV에 이런 사이즈를 적용해도 되나 싶다. 구형 터보도 20인치였지만 신형은 1인치가 더 커진 것이다. 휠, 타이어 사이즈가 커지면서 연비도 좋아지는 것을 보면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실감 난다. 미쉐린 래티튜드 타이어도 사이드월 사이프가 듬성듬성한, 그러니까 승차감, 소음 이런 것 보다 성능 위주의 디자인이다.
실내의 테마는 파나메라와 같다. 센터페시아의 디자인이나 소재가 파나메라를 방불케 한다. 구형에 비한다면 소재가 좋아진 게 두드러진다. 구형은 가격이나 포르쉐의 네임밸류에 비해 플라스틱이 조금은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신형은 그런 면에서도 부족함 없다. 그리고 우드와 메탈을 적절하게 섞은 것도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드 보다는 메탈이 주류를 이루고 모든 계기에 일일이 크롬을 덧댄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실내를 둘러보다 보면 번쩍대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오버헤드 콘솔의 디자인도 화려하다.
대시보드는 파나메라와 많이 비슷하지만 센터 플로어 쪽은 조금 다르다. 파나메라는 길게 늘어섰지만 카이엔은 보다 간소화 됐다. 사용하기 쉬운 디자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버튼의 크기도 전반적으로 커졌다. 기어 레버 하단의 차고 조절, 에어 서스펜션의 버튼 디자인은 구형과 흡사하다.
시트는 크기가 넉넉한 게 인상적이고 거의 풀 옵션이다. 요추 지지의 정도가 상당히 크고 방석의 앞부분도 따로 늘어난다. 대신 포르쉐에 기대하는 만큼의 타이트함은 아니다. 형상을 보면 등받이나 쿠션의 날개가 강조돼 있지만 시트가 커서인지 조금은 남는다. 가죽의 질이나 밀착감은 흠잡을 데가 없다. 3단계 냉방 기능도 있다.
계기판은 특유의 포르쉐 디자인이다. 5개의 원형 계기가 겹쳐 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타코미터가 위치해 있다. 속도계는 50 단위로 나뉘어져서 여전히 시인성이 좋지 않지만 타코미터 하단의 액정에 디지털 숫자가 뜨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D 모드에서 항상 단수가 표시되는 것도 맘에 드는 부분이다.
3스포크 디자인의 스티어링 휠에는 오디오와 핸즈프리 등의 버튼만 있다. 시프트 패들은 버튼 방식이다. 이전처럼 양쪽 모두 시프트 업과 다운이 가능하다. ACC는 별도의 레버로 조절한다. 시승차는 ACC의 세팅이 돼 있지 않아서 사용할 순 없었다.
2열은 무지하게 넓다. 구형도 넓었지만 신형은 휠베이스가 40mm 늘어나면서 2열의 레그룸이 더 확장됐다. 성인이 아주 넉넉하게 앉을 수 있다. 거기다 등받이의 각도도 조절되기 때문에 2열의 거주성도 그만이다. 2열은 편의성도 좋다. 우선 1열과 동일한 모양의 풀 공조 장치이다. 좌우 개별적으로 온도와 바람 세기 조절이 가능하고 열선 시트도 마련된다.
여기 도어 록 버튼이 있는 건 특이하다. 2열에서 앞문을 잠글 수 있다. 도어에 내장된 재떨이의 디자인도 감각적이다. 용량은 작지만 이게 어딘가 싶다. 그리고 블라인드도 원터치로 작동된다. 파노라마 루프가 없는 게 아쉽지만 포르쉐 임을 감안하면 없어도 상관없다. 트렁크는 3열을 놔도 될 정도로 넉넉하다.
카이엔의 V8 엔진은 2007년 부분 변경과 함께 4.8리터로 업그레이드 됐다. 신형 카이엔 터보는 4.8리터에 트윈 터보를 더한 유닛으로 최고 출력 500마력, 최대 토크는 71.4kg.m을 발휘한다. 출력은 동일하지만 차체 중량이 180kg 감소하고 8단 변속기가 적용되면서 연비는 23%가 좋아졌다. 보닛을 열면 보이는 팔뚝 굵기의 엔진 마운트는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카이엔은 여전히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건다. 위치는 당연히 그대로다. 시동 버튼에 너무 익숙해져서 인지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거는 것은 꽤나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난다. 공회전에서는 배기음이 강조됐고 다른 포르쉐에 비한다면 진동은 없는 편이다.
최대 토크는 4,500 rpm에서 나오지만 실제로는 2천 rpm을 조금 넘어서면서부터 가속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약간의 지체 현상은 있는 셈이다. 트윈 터보의 부스트는 계기판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급가속 시에는 최대 0.7바를 찍고 그 이상에서는 조금 떨어진다. 요즘의 터보 엔진에 0.7바면 저압 수준이다. 터보 S를 위해 부스트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 아닌가 싶다.
신형 카이엔 터보는 순발력 면에서도 기대를 충족시킨다. 수치로 보면 구형 450마력이 5.6초였지만 신형은 4.7초에 불과하다. 그리고 구형 터보 S (550마력, 76.5kg.m)의 4.8초보다도 조금 빠르다. 경량화가 좋긴 좋은가 보다. 그런데 체감 상으로는 가속 시 느꼈던 와일드함이 조금은 희석됐다. 구형을 처음 탔을 땐 충격적으로 거센 가속력이었는데 신형은 더 빨라졌음에도 느낌 자체가 젠틀해졌다.
순발력이 좋아진 것은 기어비의 장난이 아니다. 높은 출력의 모델답게 기어비의 폭은 넉넉하다. 2~4단의 최고 속도는 110, 177, 225km/h로 7,8단은 항속용 기어비로 남겨 놨다. 즉 6단으로 가속과 최고 속도가 마무리 된다. 8단으로 100km/h를 달리면 회전수는 1,500 rpm이 되지 않는다. 가속력을 본다면 450마력과 큰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5단에서의 가속력이다. 이전에는 250km/h에서 주춤댔지만 신형은 5단으로 268km/h을 가볍게 찍고 6단으로 넘어가도 꾸준하게 속도를 올린다. 6단 6천 rpm에서는 280km/h를 넘는다. 제원상 최고 속도는 278km/h이니 속도계의 오차일 것이다. 그리고 터보 S의 280km/h와 큰 차이도 없다. 공기저항계수가 0.39에서 0.36으로 줄어든 탓도 있지 않을까. 큰 덩치가 이렇게 빠른 속도를 내는데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내친 김에 300km/h를 찍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그만큼 차체가 안정적이다.
8단 변속기는 이전의 6단과 비교 시 직결감이 높아진 게 눈에 띈다. 주행은 물론 정차 시 충격은 없다시피 하고 D에서는 일반적인 세단처럼 편하게 탈 수 있다. D에서 수동 조작하면 다시 D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짧은 편이다. 이럴 때 스포트 모드로 변경하면 D로 복귀하는 시간이 늦춰진다.
주행 성능에서 두드러진 것은 승차감의 개선이다. 포르쉐는 선입견과 달리 대부분의 모델이 승차감이 좋다. 그런데 뉴 카이엔은 파나메라보다도 좋은 것 같다. 댐핑은 컴포트와 노멀, 스포트의 3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차이겠지만 가장 단단한 스포트가 승차감도 가장 좋다. 컴포트는 다소 출렁거리고 노멀은 좀 어중간하다. 스포트는 댐퍼가 짧아지면서 롤이 줄기 때문에 여전이 남질 않는다. 달릴 때도 가장 좋은 건 물론이다.
스티어링의 록-투-록은 2.6턴 정도로 SUV로서는 짧은 편이고 스포트 모드에서는 중심 부분이 민감해진다. 스포트 모드에서 좌우로 흔들어 보면 앞머리의 기민함이 2배는 높아지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차선 변경 시 조향을 하면 딱 원하는 만큼만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차선의 넓이를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 같다. 구형 보다 휠이 커지고 타이어 편평비가 낮아졌지만 노면을 타는 현상은 오히려 사라졌다.
동적인 운동 성능에서는 SUV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빠르게 코너를 돌아도 묵직하고 안정되게 돌아나간다. 코너링 속도를 보면 어지간한 스포츠 세단과 큰 차이가 없다. 언더스티어도 없다. 언더스티어가 날만하면 전자장비가 눈치껏 알아서 마무리를 해주는데, 운전 실력이 늘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브레이크는 200km/h 이상에서 3번, 250km/h 정도에서 1번을 연이어 했다. 보통의 자동차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에서 완전히 멈추는 제동을 2번 정도 하면 브레이크의 성능이 크게 떨어진다. 카이엔 터보는 4번째에야 페이드가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페이드가 발생하고 패드에서 연기는 피어 올라도 원래 제동력의 80% 수준은 유지한다는 점. 급제동 시 자세는 911의 SUV 버전이라고 할까?
다른 포르쉐처럼 카이엔 터보는 특별히 탓할 부분이 없다.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잘 멈춘다. 실내도 고급스럽고 장비도 많다. 구형 보다 빠르면서도 연비까지 좋아졌으니 확실한 발전을 이룬 것이다. 굳이 단점을 꼽는다면… 내가 살 수 없는 가격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