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과 악의 대비, 공간을 추상화시키는 조명
바그너의 오페라는 조명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대 장치의 설치와 변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초점을 작게 두기 때문에 조명은 공간을 만들 때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로엔그린(Lohengrin)’에서 조명의 변화는 밝은 무대를 어두운 회동의 장소로 급변시키기도 한다.
무대에 지는 그림자는 무대 위의 상황 또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그림자를 지게 만드는 조명의 변화를 따라가며 관람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작품은 특히 조명을 사용하여 추상적인 공간을 창출하는데, 명암은 선과 악의 대비로 볼 수도 있고, 흔들리는 내면의 양면으로 볼 수도 있다.
‘로엔그린’에서 회전하는 무대는 조명의 변화와 함께 그림자와 같이 어두운 세계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무대가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고 밝아지기도 하지만, 비대칭적인 조명의 변화를 줄 때도 있는데, 무대 위 등장인물들의 움직임과도 연결된다.
무대 위에 등장한 많은 사람들은 계단형의 구조물에서 등장인물이 의자에 앉는지, 테이블에 걸쳐 앉는지,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서는지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때 조명은 이들과 함께 한다. 사람들이 약간씩이라도 움직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에 따라 조명 밝기도 달라진다는 점이 눈에 띈다.
◇ 바그너의 여성상... 감정의 간극을 극복하는 소프라노 서선영
바그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800년대에 활약한 작곡가이다. 우리가 보는 그 이후 독일 사람들과는 다른 시야를 가지고 그는 창작을 했다. 모든 사람이 정치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고, 바그너는 권력을 잡으려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바그너의 오페라에는 구원의 여인이 등장한다. 바그너의 구원 모티브는 주로 영혼이 외로운 남자의 손을 구원의 여인이 잡아주는 공통점이 있는데, ‘로엔그린’은 다르다. ‘로엔그린’의 엘자(소프라노 서선영 분)는 멍청하고 답답하게 보인다. 마법적으로 나타난 로엔그린(테너 김석철 분)을 맹신하면서 그가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서선영은 여자의 연약함이 아닌 인간의 연약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서선영은 주도적이지 못한 여인 엘자를 표현하면서, 그 안에서 주도적인 면을 찾으려는 내적 시도를 한다는 것을 공연을 직접 관람하면 느낄 수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소화하는 실력을 갖춘 서선영은 엘자라는 캐릭터와 심리적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성악가 자신이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완전히 재해석하여 무대에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무대에 누워서 아리아를 부르기도 하는 서선영의 내면 표현 방법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로엔그린’은 오르트루트(소프라노 카트린 위놀드 분)와 로엔그린의 파워게임으로 볼 수 있다. 권력을 쥐기 위해 둘 다 죄 없는 사람을 이용한다. 오르트루트는 델라문트(바리톤 토마스 홀 분)을 이용하고, 로엔그린은 엘자를 이용한다. 백조 고트프리트(양진형 분)는 양쪽 파워게임의 공통 희생양이다.
으스스하고 구슬픔의 정서 속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속임수와 위선의 힘이 난무한다. 믿음과 의심,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하며,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의심하게 만드는 힘이 얼마나 큰지 이 작품은 느끼게 만든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종이를 공중으로 던져버리는 동작을 자주 하는데, 불만의 표시, 화났다는 표현이다. 하인리히 왕(베이스 미하일 페트렌코 분)과 전령(베이스 손혜수 분)은 그래도 중립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둘 다 베이스 성악가가 맡은 역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 진실을 결투로 결정하는 비논리성... 원작과는 다른 감정을 소화하는 테너 김석철
‘로엔그린’은 진실의 진위를 결투로 결정한다는 비논리성을 가진 작품이다. 진실된 사람이 이기도록 신이 결정해준다는 종교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철두철미한 조사를 통해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결투로 판단하는데, 결투의 결과가 하늘의 심판, 신의 판단으로 믿는다.
의회를 상징하는 무대 장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데, 내용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감정적인 작품이다. 카를로스 바그너 콘셉트의 ‘로엔그린’은 다른 버전의 공연에 비해 종교적인 색채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예 배제되지는 않았다. 심리극의 측면에서 감상하는 것이 관객입장에서는 편할 수 있다.
로엔그린 역의 김석철은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그야말로 인상적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마법에 의존하는 힘을 표현한 것일 수 있는데, 쇼프로그램의 특급 게스트가 무대에 오른 것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로엔그린은 엘자에게 묻지도 말고 알고 싶어서 근심하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로엔그린의 출신과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엘자와 다른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본을 직접 쓴 바그너는 궁금증을 무대 위 등장인물들과 관객들에게 공유하게 만들었다.
결말의 반전은 오페라를 처음부터 다시 짚어가며 적용하도록 만든다. 오페라는 많은 경우 갈등을 개연성 있게 제대로 해소하지 않고 마지막에 그냥 음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꽤 많은데, 바그너는 스토리의 연극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겼다.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바그너는 공연의 종합 기획과 실행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명예, 믿음의 가치관이 작품 내내 강조되지만, 관객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다른 것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철학과 사상이 내재된 스토리가 가지는 해석의 다양성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