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타이칸은 전기차의 물결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모델이다. 고성능 엔진을 앞세워 스포츠카 시장에서 명성을 쌓아온 포르쉐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출시 이후 큰 인기를 끌면서 예약 대기 기간만 1년에 이르고 있다.
국내에서 타이칸을 소개하기 위한 포르쉐코리아의 노력도 활발했다. 2019년 11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타이칸을 선보인 후, 2020년 6월에 타이칸의 가격을 공개했으며 그해 9월 ‘포르쉐 월드로드쇼’에서 서킷 주행 기회를 제공했다. 두 달 뒤엔 공식 출시행사를 통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0→시속 100㎞ 가속시간 2.8초의 무시무시한 성능은 이미 트랙에서 직접 체감했고, 서킷을 달리면서 포르쉐다운 뛰어난 스포츠성도 확인했다. 이제 확인이 필요한 건 1회 충전 주행거리뿐이었다.
타이칸의 1회 충전 주행거리는 WLTP 기준으로 터보 S가 412㎞, 터보가 450㎞, 퍼포먼스 배터리가 407㎞,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가 463㎞로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국내 인증은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가 289㎞였다. 이 수치가 발표될 당시 포르쉐 이석채 매니저는 “실제로 한국에서 달려보니 350㎞ 정도 주행이 가능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수치마저도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포르쉐코리아는 이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강원도 고성에서 속초, 양양 일대를 달리는 시승회를 기자들에게 마련했다. 주행거리가 350㎞, 시승시간만 대여섯 시간에 이르는 장거리 시승 기회다. 시승차는 93.4㎾h의 배터리를 장착한 타이칸 4S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모델이다.
시승차는 대부분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탔는데, 내가 속한 조는 100㎏에 가까운 거구 세 명이 탔다. 포르쉐코리아가 마련한 ‘연비 대결’에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에어컨도 다 켜고 급가속도 하면서 할 건 다 해보기로 했다. 출발 당시의 배터리 충전은 97%, 주행가능거리는 384㎞가 찍혀 있었다.
타이칸은 공도 시승에서 서킷과는 완전히 다른 주행 감각을 보여줬다. 571마력에 이르는 고성능 전기 스포츠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주행이 매끄럽고 편안했다. 특히 직선 구간에서 시속 80㎞~100㎞ 정도로 크루징을 하면 렉서스 LS가 연상될 만큼 안락하고 부드러웠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요즘, 타이칸이 빠져나가던 내 영혼을 다시 재충전해줬다.
하지만 와인딩 로드에서는 조금 달랐다. 고저 차이가 심한 강원도 일대의 와인딩 로드를 달릴 때는 무거운 배터리가 약간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911을 탈 때처럼 차체를 날리면서 달리면 하체의 무게가 꽤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다. 타이칸 특유의 움직임에 충분히 적응된다면 해결될 문제라는 얘기다.
정지에서 시속 100㎞ 가속시간은 4.0초인데, 파나메라4의 5.3초보다 훨씬 빠른 기록이다. 타이칸 터보는 3.2초, 터보 S는 2.8초인데 일상 주행에서는 타이칸 4S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에어컨 작동 여부는 연비에 영향을 미치는데, 타이칸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시승 도중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해봤지만, 연비에서 큰 변동은 없었다.
최종 도착 지점에서 확인한 주행가능거리는 85㎞. 출발 지점부터 달려온 348㎞를 합치면 총 433㎞를 달릴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 인증 거리인 289㎞가 지나치게 짜게(?) 나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주행가능거리가 잘 나온 덕에 내가 속한 조는 전체 2위를 차지했다. 연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달린 결과다. 1등을 차지한 1호차 팀은 102㎞의 주행가능거리가 찍혔다.
1호차는 다른 팀에 비해 타이어 덕을 본 측면이 있다. 우리 팀의 경우 앞 타이어가 245/45R20 사이즈인데, 1호차는 225/55R19 사이즈였다. 타이어 폭이 넓고 휠이 크면 당연히 연비(전비)가 떨어진다. 우리보다 하루 뒤에 시승한 이들 중에도 1등을 차지한 팀은 1호차에서 나왔으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다만 우리가 시승한 날에 목적지 도착 전 주행가능거리가 ‘0’으로 찍힌 차가 한 대 있었다. 대부분 주행가능거리에 여유가 있었는데, 이 차만 이렇게 된 건 주행을 남달리 과격하게 했다거나 회생 제동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타이어 폭이 265㎜, 휠이 21인치로 다른 차보다 불리했다. 어쨌든 그런데도 이 차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함으로써 350㎞ 주행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다.
우리가 시승한 타이칸 4S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모델의 기본 가격은 1억4560만원이고, 옵션을 더한 가격은 1억8460만원이다. 옵션에는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950만원을 비롯해 아이스 그레이 메탈릭 외장 컬러 350만원, 20인치 휠 370만원, LED 매트릭스 헤드램프 250만원, 헤드업 디스플레이 230만원,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260만원 등이 포함돼 있다.
사실 포르쉐의 가격 정책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많은 말들이 있었다. 이 차의 경우도 1억4560만원짜리 차에 LED 헤드램프와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옵션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포르쉐의 모델들은 기본 가격에서 최소 2000만원 이상, 때에 따라서는 3000만~4000만원을 더 줘야 어느 정도 원하는 옵션을 갖춘다는 얘기다. 선택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옵션은 포함해서 기본 가격을 책정하는 게 더 솔직해 보인다.
이렇게 해서 타이칸에게 마지막 남은 퍼즐이었던 주행가능거리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국내 인증 주행거리와 상관없이, 실제 주행에서 330~350㎞는 거뜬해 보이고 회생 제동을 잘 쓰면 400㎞를 넘기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무엇보다 보조금을 받을 수 없는 차임에도 1년치 주문이 밀려 있다는 게 이 차의 상품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타이칸은 파나메라에 비해 뒷좌석이 조금 불편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장점이 훨씬 많다. 따라서 파나메라를 비롯해 럭셔리 세단의 수요를 상당히 흡수해 나갈 것이다. 주문 후 1년 동안 기다릴 수 있다면 살 만한 가치가 충분한 차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