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형 혼다 시빅은 그 동안의 고객 요구사항이었던 내비게이션을 기본사양으로 갖추었으며, 1.8 모델보다 가격을 더욱 낮춘 ‘1.8 스타일’을 추가한 것이 특징이다. 시대를 앞선(앞섰던) 패키징과 실내 디자인, 운전 재미는 여전히 돋보이지만, 이번에 시승한 2.0 모델의 가격경쟁력은 아쉽게 느껴진다.
글/ 민병권 (www.rpm9.com 에디터)
사진 / 박기돈 (www.rpm9.com 편집장), 민병권
‘시빅 신드롬’을 내세워 우리나라에 상륙한지도 만 3년이 넘었다. 데뷔 당시에는 기대보다 높은 가격으로 실망의 소리가 있었지만, 2천만 원 대 수입차 시장의 대표모델로 자리잡으면서 꾸준한 판매가 이루어졌던 시빅이다. 하지만 2009년형 2.0 모델부터는 가격이 3천만 원대에 진입했고, 환율문제와 원자재가격 인상을 이유로 몸값이 계속 상승하더니만 지난 가을 출시된 2010년형에 와서는 2.0이 3,390만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있다.
올해 초부터 미쓰비시와 닛산이 전략모델의 가격을 낮추면서 적극적인 시장공략에 나선 것을 생각하면, 혼다는 다른 전법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인상된 가격은 그대로 둔 채 예전 사양에는 없었던 올인원 내비게이션을 2010년형 모델부터 적용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요즘 차들이 흔히 그렇듯이 시빅도 오디오 조작부가 대시보드 일체형으로 디자인되어 있지만, 해당 부품을 바꾼 2010년형은 그 자리에 2DIN사이즈의 내비게이션을 넣었다. 그전까지는 출고 후 이런 내비게이션 매립 개조를 하기 위해 해외 시장용 대시보드 부품을 수입해 오는 적극파 오너들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내비게이션 제품 자체는 현대모비스의 것이지만 차와의 통합률을 보면 혼다코리아에서 꼼꼼히 챙겨 적용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령, DMB는 주차브레이크를 당겨야 방송화면을 볼 수 있다.) 모니터는 6.5인치 터치스크린이고 해상도도 만족스럽다. 맵SW로는 맵피를 쓰고, TPEG와 DMB, 블루투스 등 다양한 기능을 지원한다.
아래쪽의 공조장치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멀티미디어/내비게이션 기능만을 수행하는데, 시빅 특유의 계기판 배치로 인해 내비게이션 화면이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다. 편의성, 완성도 면에서 100점은 못 주겠다. 드러누웠던 화면을 원위치 시킬 때의 직관적이지 못한 조작법이나 잡소음 문제는 차지하고 스티어링휠에 있었던 오디오 리모컨이 달아난 것이 가장 아쉽다. 내비게이션의 납작한 버튼을 눌러 볼륨을 조절하는 것은 원래 오디오의 다이얼을 돌리는 것보다 조작성이 떨어지는데 말이다.
센터페시아 하단 시거잭 부분에 있었던 AUX단자가 사라진 대신에 그 옆으로 USB 연결선을 뽑아 놓았는데, 다른 차에서 잘 쓰던 USB메모리스틱이나 MP3플레이어를 연결해도 MP3파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도 물음표를 남겼다.
이처럼 내비게이션의 적용과 관련된 내용 외에는 달라진 부분이 딱히 없다. 국내 첫 출시 당시와 비교하면 외관이 일부 바뀌었지만 이는 2009년형 모델에서 페이스리프트된 모습 그대로이다. 헤드램프와 테일램프,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 등에 각을 조금씩 세운 것이 예전보다 단단해진 인상을 풍기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달라지지는 않았다. 앞유리 밑단을 최대한 앞으로 밀어낸 ‘캡포워드’, 그리고 보닛에서 트렁크까지를 한 덩어리처럼 만든 ‘모노폼’ 디자인이 시빅만의 독특한 인상을 결정짓는다.
헤드램프 안쪽은 까맣게 그을렸고 (시승차는 검정색이라 잘 드러나지 않지만) 라디에이터 그릴 하단과 안개등 주변을 유광 검정색으로 장식했다. 점등 때 LED처럼 보이기 쉬운 테일램프는 사실 전구불빛을 렌즈들로 반사시킨 것. 2010년형은 휠 디자인이 바뀌었는데, 각을 세운 외관과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나온 지 5년째가 되는 실내 디자인은 여전히 신선하게 보인다. 혼다의 최신 모델들 역시 이 디자인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니, 나이를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방식인 속도계와 아날로그인 엔진회전계를 2단으로 분리해 HUD 부럽지 않은 시인성을 확보한 멀티플레스 계기판이 압권이다.
실내색상은 차체 색이 ‘레드펄’인 경우에만 밝은 회색으로 나오고 나머지에는 검정색으로 적용된다는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검정색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그리 어두운 분위기만은 아니다. 범람하기 쉬운 크롬장식을 배제한 채 플라스틱의 다양한 질감처리와 적절한 조작감, 작동음 설정만으로 높은 감성품질을 이끌어낸 것은 알찬 소형차 만들기의 고수다운 모습.
곳곳에 자리잡은 유용한 수납공간들과 평편하게 뽑아낸 뒷좌석 바닥도 눈에 띈다. 이 급의 최신모델들은 벤치마킹 상대로 시빅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2006년 시승 때 덜거덕거림이 이상했던 헤드레스트들은 이제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사양은 일장일단이 있다. 파란색 LED를 이용한 발공간, 콘솔 조명처럼 이 급에서 소홀하기 쉬운 감성 조명은 챙긴 반면 ECM룸미러, 오토헤드램프, 오토와이퍼 등은 갖추지 못했다. 얼핏 시동버튼으로 착각하기 쉬운 빨간색 원형버튼은 비상등 스위치. 스마트키가 아닌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폴딩 키가 아닌 것은 아쉽다. HID헤드램프와 크루즈컨트롤, 후방감지센서가 달렸고, 랜서가 빠뜨린 화장거울 조명도 여기에는 있다. 에어백은 전방, 측면, 커튼 에어백을 갖추었고 주행안정장치인 VSA도 달렸다.
엔진은 예전부터 써온 2.0리터 DOHC i-VTEC으로,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 6,000rpm에서 155마력의 최고출력을 내고 4,500rpm에서 19.7kgm의 최대토크가 나온다. 국산 차들도 성능이 높아지면서 제원상의 갭은 줄었지만, 스티어링휠에 변속 패들이 달린 스포츠모드 5단 자동변속기와 i-VTEC엔진의 조합이 선보이는 실제 달리기의 질감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어드밴스드 다이내믹 세단(Advanced dynamic sedan)이라는 수식어에 이의가 없다.
거시기하게 생긴 변속레버를 D에서 아래로 한 단 내리면 스포츠모드가 되고, 이 상태에서 스티어링휠 뒷면의 변속패들-버튼을 터치해주면 수동모드에 진입한다. 수동모드에서의 변속조작은 레버가 아닌 패들로만 가능하고, D에서도 패들을 건드리면 수동모드가 되긴 하지만 유효시간은 극히 짧다.
문득 변속레버보다도 가깝게 자리한 주차브레이크 레버에 눈이 간다. 국내 사양이야 자동변속기뿐이니 상관없지만 수동변속기라면 둘의 위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쓸데없는 걱정부터 하고 있다. 최근에 공개된 혼다의 하이브리드 스포츠카- CR-Z에 달린 수동변속기 때문인가 보다. (참고로,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미국 사양의 시빅에서도 수동변속기는 오른쪽, 주차브레이크는 왼쪽에 있다.) 스포츠모드는 회전수를 확실하게 높여주고 - 레드존이 6,800rpm부터라 여유가 많다 - 스마트 패들도 반응이 좋다.
은근한 타원형인 입체감 만점의 스티어링휠은 시빅의 까랑까랑한 달리기에 재미를 더한다. 다만가속시 서걱거리는 배기음과 단단하면서도 가볍게 들썩거리는 하체 느낌이 이제 마냥 좋지만은 않다. 주행 소음과 노면 충격음은 줄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100km/h에서의 엔진회전수는 2,100rpm. 공인연비는 11.5km/L로 그리 좋지 않은 편이지만 달리기 실력과 운전재미를 생각하면 이해해 줄만 하다.
반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가격이다. 3,390만원이라는 현재의 가격은 닛산의 알티마 2.5, 폭스바겐의 골프 TDI, 그리고 혼다의 CR-V 2WD 모델과 똑 같은 것이니 말이다. 차의 만듦새와 시빅만의 매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중적으로 어필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돌파구는 무엇일까.
2.0에서 사이드미러 턴시그널, 배기파이프장식, 크롬도어핸들, 스포일러, 블루LED실내조명, 선루프, HID헤드램프, 주차센서를 뺀 1.8 모델은 2,890만원이다. 엔진이 140마력 SOHC이고, 변속패들, 차속감응 파워스티어링, 커튼에어백, VSA도 함께 빠진다. 여기에서 가죽시트, 내비게이션 등을 추가로 없앤 1.8 스타일은 2,690만원.
어차피 1.8이 주력이고 2.0은 이미지 모델이라면 아예 타입R이든, Si든 고성능 모델을 가져다가 골수 혼다 팬들이라도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떨까. 떡 줄 사람 생각 안 하는데 또 이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