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뉘르부르크링이라는 유서 깊은 자동차경주장이 있다. 이곳의 북쪽 코스는 한 바퀴를 도는 거리가 21km나 되고, 심한 고저 차이와 73개의 코너를 갖추어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녹색 지옥(green hell)’이라는 별명이 그 가혹함과 위험성을 대변해주는 이 경주장은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성지’ 중 한곳이기도 하다.
2009년 10월 21일, BMW 3시리즈 한 대가 이 트랙을 완주했다. 운전자가 손을 놓은 상태로. 게다가 단순한 완주가 아니라 전문 운전자와 동일하게 ‘이상적인 라인’을 따라 주행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개의 코너가 연결되며 이어지는 자동차경주장의 도로(트랙)에는 그 마다 최적의 통과 라인이 있다. 이 라인을 따라 주행하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트랙을 돌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몸에 익히는 것이 자동차 경주의 기본이고, 고급 운전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라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가르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가령 교관이 교육생을 차에 태우고 직접 시범을 보이더라도, 동반석에 앉아서 보는 것과 운전석에 앉아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BMW가 ‘트랙 트레이너’라고 부르는 다섯 대의 3시리즈(BMW 330i, 자동변속기)를 개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트랙트레이너는 정밀 GPS와 디지털 매핑, 영상 정보, 그리고 각종 센서로부터의 데이터를 복합적으로 활용한다. 먼저 교관이 트랙을 몇 바퀴 돌고 나면 각 지점에서의 차량 위치, 가속페달 개도, 조향각 등 이상적인 라인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가 분석되어 차에 저장된다.
준비를 마친 트랙트레이너는 이를 토대로 자동주행을 실시한다. 교육생을 운전석에 태우고 교관의 주행을 똑같이 재현해내는 것이다. 운전대 위에 손을 가볍게 올린 교육생은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운전대를 돌려야 하고 코너 안쪽의 어느 부분을 통과해야 하는지, 가속페달은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등을 직관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를 통해 감을 익히고 나면 자동주행 기능이 해제된 상태에서 직접 운전을 해볼 수 있다. 이때는 LED경고등, 경고음, 그리고 운전대의 진동 등을 통해 이상적인 라인의 준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을 마치고 나면 그 동안 카드에 저장된 주행기록을 PC에 옮겨 교관과 함께 확인해가며 문제점을 짚어볼 수 있다.
BMW는 1977년부터 운전자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해왔고 매년 18,000명의 BMW, MINI, BMW모터라드 오너들이 이를 이수하고 있다. 트랙트레이너는 이러한 교육프로그램의 교관들이 제기한 필요성에 따라 개발된 것으로, BMW그룹의 선행기술 연구를 맡고 있는 BMW테크닉社가 실용화했다.
2006년에 트랙트레이너를 처음 공개한 BMW는 2007년부터 운전자 교육프로그램에 이를 실제로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초기에는 뉘르부르크링을 달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기술이 업그레이드된 덕분에 2009년 가을에는 주행시범을 보일 수 있었다. (담당 연구원에게 물었더니 라인 추종의 정확성을 평가하기 위한 테스트였기 때문에 최고시속은 180km/h로 제한했고 따로 랩타임은 측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초 BMW는 이 기술을 일반 차에는 적용할 계획이 없다고 못박았었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기술들이 활용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BMW가 뒤이어 공개한 ‘비상 정지 보조(Emergency Stop Assistant)’ 시스템은 운전자가 심장발작 등으로 갑작스레 운전불능 상태에 빠질 경우, 차 스스로 주변 차량들을 피해가면서 차선을 변경해 갓길까지 이동하고 구조연락도 취한다.
글/민병권 (www.rpm9.com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