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현대정공에서 만들고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팔았던 싼타모(이후 ‘현대자동차 싼타모’를 거쳐 ‘기아 카스타’로 진화)는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의샤리오(Chariot) 모델을도입해 개량한 모델이었다. 당시 7인승이었던 샤리오에게는 차체가 더 짧고 뒷좌석용으로 슬라이딩 도어를 갖춘 형제차가 있었으니, 그것이 일본의 젊은 세대를 겨냥해 만들어진 미쓰비시 RVR이었다.
이번에 시승한 것은 그 RVR의 3세대 모델이다. 10년 전 단종된 2세대 RVR의 이름을 다시 이어받은 이 모델은 2010년 봄에 일본에서 출시됐고, 우리나라에는 올해 3월 상륙했다. 수입사 사정 등으로 한동안 국내에서 유명무실했던 미쓰비시가 새 수입사인 CXC와 함께 전열을 가다듬어 앞장세운 첨병이다.
유럽에서는 ‘ASX’, 미국에서는 ‘아웃랜더 스포츠’로 판매되는 이번 RVR은 미쓰비시의기존 크로스오버 모델인 아웃랜더를 짧게 줄여 만든 버전이라는 면에서 20년전 샤리오와 1세대 RVR의 관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아웃랜더가샤리오와는 다르듯이 새 RVR도 1세대와는 성격이 같지 않다. MPV, 미니밴에서 파생된 차의 냄새가 사라지고 SUV에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7인승/왜건 스타일로 실용성을 챙긴 아웃랜더와 비교했을 때, 5인승/해치백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RVR은 ‘더 흔쾌히 즐길 수 있는’ 차로서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는 점에서 1세대와 통한다.
RVR의 차체 크기는 길이 4,295mm, 폭 1,770mm, 높이 1,630mm(루프레일 포함 1,640mm), 휠베이스 2,670mm이다. 기아 쏘울(4,120x1,785x1,610, 2,550)과 스포티지R(4,440x1,855x1,635, 2,640)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아웃랜더와 비교하면 앞은 거의 10cm, 뒤는 25cm가 짧고 높이는 5cm낮다. 휠베이스는 동일하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아무래도 길쭉한 아웃랜더보다는 RVR의 인기가 높지 않을까라고 넘겨 짚어볼 수 있다.
미쓰비시 아웃랜더를 OEM으로 가져가 ‘푸조 4007’, ‘시트로엥 C크로서’로 팔아왔던 프랑스 ‘PSA 푸조 시트로엥’ 그룹은 이 RVR 역시 ‘푸조 4008’, ‘시트로엥 C4에어크로스’로 라인업에 추가하고 있다. 푸조 라인업에 있는 또 하나의 5인승 크로스오버 모델 ‘3008’은 차체크기(4,365x1,837x1,639, 2,613)가 RVR과 겹치는 듯 하지만 성격이 MPV쪽에 좀더 가까워 보인다. 참고로, 일본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RVR의 주력시장은 유럽이라고 한다. 미국 시장에서는 2010년 가을에 출시됐는데, 올해 중반부터는 현지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RVR의 외관은 처음 보는 차인데도 익숙하다. 수년전부터 사진으로 자주 봐온 탓도 있겠지만, 랜서에볼루션으로 대표되는 미쓰비시의‘제트파이터 그릴’, ‘역슬랜트노즈’의패밀리룩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미쓰비시갤랑 포르티스 해치백, 즉 랜서 해치백을 앞뒤에서 힘껏 눌러놓으면 이런 모양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테일램프를 위시한 뒷 모습은 다른 브랜드 차들을 떠올리게 한다. 잔뜩 찌푸리고 입을 앙다문 인상이 조금은 갑갑해 보인다. 해외사양에는 그릴 안쪽이나 범퍼 아래쪽을 모두 검게 처리한 버전도 있는데,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휀더는 플라스틱 재질이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긴 휠베이스와 짧은 앞뒤 오버행, 그리고 하체를 바싹 끌어올린 탄탄한 모습은 앞서 말한 즐길 수 있는차의 감각을 제공하는 요소들이다. 말하자면 도심뿐 아니라 흙 바닥에 끌고 들어가 마구 굴려도 재미있을 것 같은 생김새다. 승용차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크로스오버 모델들은 범퍼만 높이 띄워 눈속임을 했을 뿐 실제 최저지상고는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차는 앞뒤 모두 살펴봐도 지면을 향해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없다. 물론 접근각과 이탈각도 유리하게 생겼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오프로드에 잘 대응할 것처럼 생겼다는 것인데, 이러한 부분들은 도심에서 각종 장애물들을 빠져나갈 때에도 은근 자신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내는 간결한 느낌이다. 메탈룩이나 크롬 장식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검정색 플라스틱 바탕이 지배적으로 다가온다. 혹자는 편해 보인다고, 혹자는 값싸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시보드전면부나도어 패널 상단은 부드러운 재질이다. 플랫폼을 공유한 랜서, 아웃랜더 등과 공용 하고 있는 스티어링휠과 에어컨 조작부, 부담스러운 그래픽의 계기판 컬러 액정 등으로 인해 새로운 차라는 기분은 반감되고 있다. 공용품의 디자인이나 기능, 감성적인 면이 우수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어쨌든 에어컨은 자동 온도 조절이 되고, 버튼 시동 스마트 키, 크루즈 컨트롤, 오토 헤드램프와 오토 와이퍼 기능도 갖추었다. 다시 한번, 기대보다 사양이 좋은 미쓰비시 차다. 하향등은 HID이고 룸미러는 눈부심 방지는 물론 후방카메라 화면까지 보여준다. 원터치트리플깜빡이 기능, 시동을 끈 후에도사이드미러를 접을 수 있는 전원유지 기능도 있다. (훨씬 비싼 수입차 중에도 이게 안 되는 차들이 수두룩하다.)
다만 윈도우 스위치는 운전석만 오토이고, 조명을 너무 아꼈다. 어두운 곳에서 차에 올라 시동버튼을 눌렀을 때는 내비게이션 초기화면의 흰색 바탕 덕분에 실내 나머지 부분이 죄다 컴컴하게 보이기도 한다.
한글 내비게이션은 깔끔하게 적용되어 있긴 한데 화면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있어서 모서리 부분 내용이 가려진다. 오디오 볼륨 조절은 기기나 스티어링휠의 버튼으로 하면 되는데, 내비게이션 음량 조절법을 못 찾았다. 내비게이션과 AV기능을 통합한 이 기기에는 ‘미쓰비시 멀티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시승차의 것은 카드를 찾을 수 없다는 오류메시지가 뜨고 재부팅 하다가 멈춰버리는 등 안정성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USB와 AV입력단자는 에어컨 조작부 아래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너무 깊으면 오히려 쓰기 불편할 수 있는데, 안쪽에 잊지 않고 조명을 달아놓았다. 주요 버튼들의 조명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이다. 이외에도 컵 홀더가 2개 있고 라이터 옆의 캔 타입 재떨이를 치우면 홀더가 하나 더 생기기 때문에 소지품을 꺼내놓기 편하다. 도어 손잡이에도 뭔가 넣을 수 있고, 도어 포켓도 유용하다.
가운데 팔걸이 안쪽 박스는 2층 구조로 되어있다. (시거잭이 아닌) 진짜 전원소켓은 이 안쪽에 마련되어 있어 밖에 나가있는 외부입력단자들과는 따로 노는 듯 보인다. 사실 센터콘솔의 배치는 디자인이 다를 뿐 그 구성이 아웃랜더와 동일하다. 열선 버튼이 센터콘솔과 가까운 시트의 방석 부분에 붙은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아웃랜더와 달리 열선 버튼 조작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시트와 센터콘솔, 팔걸이의 위치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인 선루프처럼 지붕을 열 수는 없으나 개방감이 훨씬 큰 UV차단 유리 지붕을 가졌다. 푸조에 OEM차를 공급하더니 그 영향을 받았는가도 싶다. 유리지붕의 전동 햇빛 가리개 스위치는 헤드콘솔의 맵등 스위치 바로 옆에 있다. 운전석 기준으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주차브레이크가 오른쪽에 쏠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차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햇빛 가리개 스위치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위치에는 ‘문라이트(Moonlight)’ 버튼이 있다. 유리지붕 양 측면을 따라 주황색 LED조명을 비춰주는 기능인데, 효과가 매력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단계별 밝기 조절이 되고 끌 수도 있다.
지붕이 뒤로 갈수록 낮아지며 왜건보다 짧게 끝나는 해치백 스타일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다면 잠시 놀랄 수도 있을 만큼 뒷좌석 머리공간은 좁다. 뒷좌석에 오를 때 예상보다 방석이 높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등받이는 더 세울 수는 있어도 뒤로 기울일 수는 없다. 슬라이딩도 되고 리클라이닝도 되는 아웃랜더의 뒷좌석과는 다르다. 엉덩이를 조금 빼서 앉고 그 대신 탁 트인 파노라마 글래스 루프의 개방감을 위안 삼아야겠다.
다행히 앞 좌석 아래쪽 공간은 블랙홀처럼 깊어 발을 뻗기에 문제가 없고, 시트레일 부분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센터터널이 약간 튀어올라 있지만 좁게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다. 등받이 기본 각도도 보기에는 가파른데 앉아보면 괜찮다. 시트를 접을 때는 방석이 고정된 채 등받이만 6:4로 분할돼 접힌다. 별도로 스키스루도 가능하다. 가운데 팔걸이의 컵홀더가 있을 뿐, 뒷좌석용 송풍구나 열선 등은 보이지 않는다.
전자식 릴리즈로 열리는 테일게이트는 여닫을 때의 무게감이 무난하다. 엉덩이가 잘록해 보이는 것에 비해 트렁크 공간은 의외로 넉넉해 보인다. 기본 용량은 384리터라고 한다. 유리부분까지 짐을 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경사진 테일 게이트 형상이 신경 쓰이긴 하겠다. 문턱이나 바닥 높이 등은 -아웃랜더에 비할 수는 없지만- 적당한 수준이다. 다만, 바닥판 아래로는 추가 수납공간이 없고 곧장 스페어 타이어가 나타난다. 스페어 타이어 대신 펑크수리킷과 추가 수납공간을 마련한 사양도 있는 모양이지만, “자동차 회사들이 멋대로 스페어타이어를 없애고 있다”는 식으로 TV보도에서 문제를 삼는 나라에는 그냥 스페어 타이어가 낫겠다.
이런 차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지만 타고 내리기가 참 좋은 높이에 시트가 있다. 그만큼 운전 중 시야도 일반 승용차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된다. 운전석은 전동 조절이 되고 (동반석은 수동인데, 높이 조절은 안 된다.) 시트 형상은 적극적으로 몸을 잡아주는 타입은 아니다. 뒷좌석과 달리 앞좌석 머리 공간은 충분하다.
스티어링 휠은 묵직하고 부드럽게 돌아간다. 저속에서는 충분히 가벼워지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다. 주차장 안을 배회하는 수준에서는 구동계의 정숙성과 매끄러움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조금 가속을 해볼라치면 곧장 소음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엔진 회전수를 높게 써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회전계는 2500rpm 정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도 휭휭 거리는 소리가 실내에 울린다. 다른 차들과 보폭을 맞추려 할 때 예상보다 페달을 깊이 밟아야 원하는 만큼의 속도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체감 성능을 떨어뜨리는 부분이다. 익숙해지고, 둔감해지면 해결되는 문제들이긴 하다. 태어나서 이제 겨우 200km를 걸음마한 시승차를 성급히 다그친 탓일 수도 있겠다.
엔진은 가솔린 2.0리터 직렬 4기통으로, 6,000rpm에서 150마력의 최고출력을, 4,200rpm에서 20.1kgm의 최대토크를 낸다. 아웃랜더는 2.4리터, 3.0리터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니 여기서도 자연스럽게 차급이 나뉜다. (유럽 시장용 RVR은 디젤엔진도 탑재한다.) 변속기를 가만 놔두면 100km/h에서의 엔진회전수는 2000rpm이다.
‘INVECS-III’라는 명칭이 붙은 미쓰비시의 CVT는 ‘무단’변속기이지만 ‘6단’ 수동 모드도 제공한다. 레버를 D에서 왼쪽으로 뽑아야 수동모드가 되는데, D에서도 스티어링 휠의 변속 패들만 당겨주면 수동모드로 진입한다. 이때는 엔진 브레이크도 유효하다. 어떤 차의 패들은 플라스틱 질감과 싸구려 조작감 때문에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스티어링 컬럼에 부착된 이 차의 패들은 마그네슘 재질로 견고한 조작감을 준다. 랜서 에볼루션용으로 만든 김에 랜서, 아웃랜더, RVR까지 고루 잘 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RVR에서는 그에 걸맞는 동력성능이 아쉬울 뿐이다.
풀 가속 때는 엔진회전계가 천천히 올라가다가 6000rpm에 이르면 회전계가 고정된 상태로 속도만 계속 증가한다. 꾸준히 속도가 올라가긴 하지만 더디다. 같은 2.0+CVT 조합인 랜서와 비교해도 보폭 차이가 적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것은 제한속도 이상의 영역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시내에서 활개치고 돌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없다. 단차 없이 부드럽게 가속할 수 있는 CVT의 장점도 여기에서 돋보인다.
운전시 느껴지는 차의 부피감도 시내용으로 적당하다. 운전석 시야나 핸들링으로 인해 차가 몸에 착 붙은 느낌이 든다. 승차감은 평온하다. 껑충한 차의 불안감을 줄이려다가 단단하게 튀기만 하는 결과를 낳은 차들도 있지만 RVR의 앞/스트럿, 뒤/멀티링크 서스펜션은 부드럽고 듬직하게 반응하면서도 출렁거리지 않는다. 높은 차가 아니라 통통한 해치백의 거동이다.
ESC(ASC)개입은 부드럽다. 제동 시 페달 감각이나 차가 전체적으로 내려 앉는 듯한 느낌도 좋다. 다만 감속 때 엔진 주변 장치들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난다든지 브레이크 답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핸드브레이크는 날카롭지 않은 조작감이 좋다. 클리핑은 약한 듯 하지만 경사로에서는 밀림 방지 기능이 작동한다.
4륜 구동장치는 아웃랜더와 마찬가지로 2WD, 4WD, LOCK모드로 나뉘며, 변속기 아래쪽의 다이얼을 돌려 선택할 수 있다. 4WD에 두면 알아서 2륜구동과 4륜구동을 오가고, LOCK에서는 4륜구동에, 2WD에서는 앞바퀴 굴림에 고정된다. 4WD에서는 최대 30%, LOCK에서는 최대 50%의 구동력이 뒷바퀴로 전달된다.
평상시 앞바퀴만 굴리다가 필요할 때는 뒷바퀴로도 구동력을 보내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절약정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2WD모드를 이용하면 되긴 하겠는데, 그러다 정작 필요할 때 4륜 구동의 덕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연료절약에 민감한 운전자라면 계기판의 ECO 표시등을 따라 경제 운전을 실천하는 것도 좋겠다. 공인연비는 12.4km/L이다.
RVR은 운전자 무릎에어백을 포함해 7개의 에어백을 제공하며, 유로NCAP에서 별 다섯 개, 미국 IIHS에서 ‘톱 세이프티 픽’ 평가를 받는 등 안전성을 인정 받았다.
이번에 시승한 RVR은 4륜 구동 모델이고 가격은 3,490만원이다. 내비게이션과 글라스 루프 등 일부 사양이 빠진 2륜 구동 모델은 3,190만원이고, 아웃랜더 2.4 모델은 3,690만원이다.
글/ 민병권 (rpm9.com 에디터)
사진 / 민병권, 김진아 (rpm9.com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