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움직이는 랜서 에볼루션이 10% 저렴해졌다. 여전히 높은 가격이긴 하지만 놀라운 운동 성능은 그런 불만을 하찮게 만든다. 랜서 에볼루션의 매력은 직선 보다는 곡선에 있고 그중에서도 코너링 시 가속에 있다. 타이어 소리를 들으며 가속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엔진의 리터당 출력과 AWD의 구성을 보면 랜서 에볼루션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차였는지 알 수 있다.
글/ 한상기 (rpm9.com 객원기자)
사진/ 박기돈 (rpm9.com 팀장)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은 지금도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정확히 매칭되는 모델이 스바루 임프레자 STI 정도이다. 과거에 비하면 비슷한 성격의 모델이 많아지긴 했지만 컴팩트한 세단 보디에 저배기량+하이 부스트의 터보 엔진, AWD를 갖춘 자동차는 많지 않다. 랜서 에볼루션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랜서 에볼루션은 10세대로 발전하면서 미쓰비시의 이미지를 이끌었다. 2리터 엔진의 세단이 양산 메이커의 스포츠카 기함 역할을 한다는 게 아니러니하긴 하지만 랜서 에볼루션의 효과는 상당하다. 특히 90년대 WRC의 활약은 랜서 에볼루션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랜서 에볼루션의 구성은 여전히 독특하다. 평범해 보이는 세단 보디에, 2리터 터보 엔진, 그리고 리어 액슬 좌우로 토크를 배분하는 AWD를 갖추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상당히 앞선 패키징이었다. 점진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성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리터당 150마력에 육박하는 2리터 터보는 요즘에도 보기 힘들고, AYC는 더욱 흔치 않았다.
가장 큰 매력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화끈한 성능을 즐길 수 있는데 있다. 특히 특정 영역에서는 수퍼카를 육박하는 성능을 자랑했으니 마니아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국내에는 미쓰비시가 들어오면서 공식 수입되기 시작했고 이번에 시승하는 모델은 가격이 10% 내려간 2010년형이다. 시승차는 한국 MR 버전으로 일본의 GSR에 한국형 사양을 더한 모델이다.
아이들링은 랜서랑 별 다를바 없이 조용하다. 캠의 듀레이션이 높아서인지 회전계 바늘이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진동도 없다. 천천히 달리면 랜서 같은 차. 이런 게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지체 현상도 있기 때문에 오른발의 힘을 조절 한다면 편하게 탈 수 있다.
4B11은 4천 rpm에서 최대 토크가 나오는데, 제대로 힘을 느끼기 위해서는 회전수를 3,500 rpm 이상 띄워야 한다. 리터당 150마력의 터보 엔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지체 현상이다. 하지만 일단 부스트가 걸리면 사납게 변한다. 그 가속력에 비해서 체감은 느린 편이다. AWD에 차체도 안정적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달리다 보면 생각 보다 높은 속도에 놀라게 된다. 속도계의 숫자 배치도 통상적이랑 달라서 무심코 달리다 보면 과속 카메라에 찍힐 수 있다.
타이트한 기어비는 랜서 에볼루션의 전통이다. 5단 수동 시절에도 그랬지만 6단 듀얼 클러치로 넘어와서도 촘촘한 기어비는 여전하다. 1~4단의 최고 속도는 50, 90, 120, 160km/h로 엔진의 출력을 생각하면 각 단 사이가 상당히 붙어 있다. 기어비만 봐도 랜서 에볼루션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랜서 에볼루션은 6단은 항속으로 떼어놓고 5단으로 실질적인 가속을 마무리 한다. 5단으로 220km/h 근처까지 화끈하게 가속한다. 늘 다니던 구간에서 E 63 AMG가 230km/h를 마크하던 지점에서 210km/h을 찍었다. 출발 속도가 똑같은 건 아니니까 정확한 비교는 될 수 없지만 대충 참고는 된다. 2리터 터보 모델로서는 최고 수준의 가속력이라고 할 수 있다. 6단으로 넘어가면 가속력이 확 처지긴 하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250km/h에 도달한다. 이때의 회전수는 6,100 rpm인데 이 이상 속도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엔진은 부드러우면서도 박력이 있다. 회전수가 높아질수록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사운드는 하이톤이 섞여 나온다. 자동 변속 시점에서는 7천 rpm을 꽉 채운다. 그럼에도 토크 하락의 느낌이 별로 없고 회전을 그 이상 사용해도 될 것만 같다.
기계적인 엔진 사운드는 호불호가 갈릴듯 하다. 엔진 음은 저음으로 넓게 퍼지고 특정 회전수를 넘어서면 날카로운 음이 튀어나온다. 고회전으로 가면 소리가 더 날카로워진다. 나지막하게 붕붕대는 배기음도 매력적으로 들린다. 정체가 심한 길을 오래 가다보면 배기음 때문에 머리가 벙벙해지긴 한다.
그래도 힘들지 않은 건 SST 때문이다. 오토처럼 다닐 수 있는 SST는 불가피한 정체가 걸렸을 때 정말 고마운 존재이다. 랜서처럼 시프트 패들로 변속하면 다시는 D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단 수동 변속하면 레드 존이라도 한 번 쳐야 한다는 의미다. D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를 살짝 길게 누르면 된다. SST는 다른 고성능 버전에 올라가는 듀얼 클러치처럼 저속에서 소음이 들리고 간헐적으로는 튀는 현상도 발생한다. 포르쉐나 BMW도 이러니 랜서 에볼루션만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D에 놓고 다니면 랜서처럼 편하게 탈 수 있다. 물론 D 자체도 스포티하다. D에서도 변속 시 회전수 매칭이 되고 이는 속도가 낮을 때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자체가 스포티하다 보니 나지막한 내리막에서는 엔진 브레이크도 자주 걸린다. 기본적으로 언제든 달릴 준비가 된 셈이다.
변속기 모드를 스포트로 바꾸면 훨씬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뀐다. 가능한 회전수를 높게 가져가고 변속 시간도 빨라지며 노멀이 갖고 있었던 작은 여유도 사라진다. 더욱 빠른 모드를 원한다면 차를 멈춰야 한다. S-스포트로 모드 변경을 위해서는 차를 멈춘 후 N 또는 D에서 버튼을 3초간 길게 누르면 된다. S-스포트 사용을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시동을 다시 켜면 노멀로 자동 세팅되고, 주행 중에는 하위 모드로 바꿀 수 있다.
S-스포트는 일반 도로에서 사용하기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회전수는 4천 rpm 이상에서 놀고 어지간해서는 시프트 업을 하지 않는다. S-스포트 모드라면 굳이 수동 조작이 필요한가 싶을 정도다. 와인딩에서는 수동 대신 S-스포트에 놓고 운전에만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
참 식상한 표현이긴 한데, 코너에서는 레일을 타는 기분이다. 운전대를 돌리면 머리 뿐만 아니라 차 전체가 진행 방향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코너에서 몸은 좀 기울어지는 것에 반해 차체의 기울어짐은 적다. 그리고 차의 능력에 비해 타이어의 스키드 음은 비교적 일찍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타이어 음이 발생하는 전후에 언더스티어가 나는데, 랜서 에볼루션은 오히려 머리가 안으로 파고든다. 이래서 코너링 중에, 아니 타이어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가속 페달을 더 밟을 수 있다. 요즘의 지능형 AWD는 코너링 중 가속하면 뒤에서 밀어주는 느낌이 나긴 하는데, 랜서 에볼루션은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어지간한 코너 또는 한 번에 끝나는 직각 코너는 오히려 싱겁다. 물론 속도가 너무 높다면 언더스티어가 발생하긴 한다.
ASC는 개입 시점도 늦긴 하지만 작동을 눈치 채기도 어렵다. 그만큼 매끄럽고 공격적인 성향의 프로그램이어서 내가 운전 잘하는 줄 착각하게 된다. ASC가 작동할 정도면 계기판을 볼 여유도 별로 없다. 계기판 액정에는 S-AWC의 작동 상황이 표시된다. 앞뒤와 좌우 구동력 배분이 표시되긴 하는데 이 역시도 가속이나 코너링 시 쳐다보기 힘들다.
브렘보 브레이크의 성능은 그야말로 강력하다. 초기 반응은 약간 더디지만 일정 답력 이후에는 강력한 힘이 나온다. 제 힘을 내기 위해서는 강하게 밟아야 하고 약간 열이 받으면 더 잘 선다.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을 때 디스크에서 나는 소리도 듣기가 좋다. 고속 영역에서의 제동은 좌우 밸런스가 약간 틀어지긴 하는데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다.
운전을 마치고 외관을 살펴보면 참 신통방통하다. 껑충한 세단이 이렇게 코너에서 빠른 게 신기하다. 이전에는 랜서 에볼루션의 얼굴이 참으로 과격해 보였는데 지금은 좀 익숙하다. 일반 모델에도 많이 적용된 새 패밀리 룩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번호판이 범퍼 오른쪽에 붙은 건 고성능 터보 엔진에 대한 배려이다.
보닛에 뚫린 3개의 인테이크는 랜서와 확연한 차별화를 이루고 휀더의 인테이크도 장식이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위아래로 뚫려 있다. 리어도 매우 화려하다. 에볼루션 보다 랜서 보면 상당히 심심하다. 랜서 에볼루션의 리어 스포일러는 트렁크 리드가 높아서인지 더 높아 보인다. 순정차로 이 정도 높이의 스포일러가 드물다. 트윈 머플러나 깊게 패인 디퓨저도 강인함을 더한다.
이름만으로도 비싸 보이는 BBS 휠은 오너의 만족감을 높일 수 있는 부분이다. 타이어도 공격적인 트레드 패턴의 던롭 SP 스포트 600(245/40R/18)이다. 휠 스포크 사이로 보이는 브렘보 로고만 봐도 든든할 정도이다.
실내 디자인은 동일하지만 타는 순간 다른 차라는 게 느껴진다. 이유는 레카로제 시트. 앉을 때 엉덩이가 시트의 날개에 걸리적거린다. 방석 가장가리가 불룩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시트는 나를 꼭 안아주는 느낌이다. 레카로 시트는 선택이 넓지 않다. 대략 주어진 대로 타라는 컨셉트이다. 정도는 덜하지만 마치 엘리스의 시트 같다. 그래서 시트 높낮이 조절도 안 된다. 높낮이 조절이 안 되는 건 드물다. 그럼에도 운전 자세를 쉽게 찾는다. 등받이 각도는 다이얼로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
시트는 자잘한 주름과 질 좋은 가죽 때문에 몸이 잘 움직이질 않는다. 그만큼 밀착감이 좋다. 실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이템이 레카로 시트이다. 알루미늄 페달조차도 그립이 좋다. 발바닥에 딱 달라 붙는다. 2열은 시트가 얇아서인지 레그룸이 더 늘어난 거 같다. 2열 시트도 1열처럼 무늬도 비슷하고 생긴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2열의 쿠션이 훨씬 푹신하다
운전대도 길이 조절이 안 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 덕분에 운전 자세 찾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계기판 디자인도 같은데 세부적인 게 다르다. 우선 타코미터는 9천 rpm까지 새겨져 있고 레드 존이 7천 rpn부터 시작한다. 속도계도 300까지 새겨진다. 작은 액정 디스플레이에는 S-AWC와 SST 변속 모드 등의 정보가 추가로 나온다.
기어 레버는 수동과 닮았다. 특이하게 레버 중간에 작은 봉을 들어 올려야 모드가 변경된다. 마치 과거 대우차 수동의 후진을 넣을 때처럼 말이다. P에서 R도 들어야 한다. D-N은 그냥이지만 N에서 R과 P로 움직일 때는 봉을 들어야 한다. 약간 귀찮기도 한데 수동의 느낌이 난다.
랜서 에볼루션은 여전히 독자적인 영역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 컴팩트한 보디와 높은 리터당 출력의 2리터 터보 엔진, 그리고 잘 조율된 하체의 성능은 매력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격대로만 본다면 랜서 에볼루션이 포진한 시장은 선택이 참 많다. 그럼에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니 잘 만든 차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