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뉴욕모터쇼에 쏘나타 터보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흥분과 반가움을 기억한다. 2리터의 배기량으로 무려 274마력을 뿜어내는 엔진은 최신 엔진 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한데, 그런 엔진을 현대자동차에서 개발했고, 또 그것을 대한민국 대표 중형 세단인 쏘나타에 장착했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마침내 우리도 이런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컸음은 당연한 일이다.
글 / 박기돈, 사진 / 고병배 (RPM9 객원기자)
하지만 이처럼 매력적인 자동차가 미국시장에만 선보이고 국내에는 언제 출시될 지 기약도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우리나라 소비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커져 가고 있을 즈음, 기대하지 않았던 기아 스포티지 R 터보 GDI 출시 소식이 터져 나왔다.
사실 2리터 트윈스크롤 터보 274마력 엔진이라면 세단 중에서는 스포티하고 스타일링이 좋은 K5, 그리고 스포츠카로는 (구동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독보적인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인 제네시스 쿠페에 장착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듯한데, 의외로 스포티지 R에 가장 먼저 장착되어 국내에 출시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K5가 먼저 출시되었지만 국내 법규에 맞추자면 별도의 개발이 추가로 필요하고, 스포티지의 경우 초기부터 국내 출시 일정에 맞추어 개발을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기대했던 2리터 트윈스크롤 터보 엔진이 국내 시장에 등장했다는 것이 반갑고, 스포티지 R 터보 GDI를 통해서 이 엔진의 성격과 성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기자와의 데이트를 위해 세차장에서 목욕재계 중인 스포티지 R을 만났다. 평소 스포티지 R의 멋진 디자인에 마음을 뺏기고 있던 터라 곱게 단장 중인 스포티지 R이 그렇게 더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첫 눈에 기존의 스포티지 R과 터보 GDI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찾기가 쉽지 않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혹은 내 옆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스포티지 R이 터보 GDI인지 정도는 알아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세히 살펴보면 라디에이터 그릴의 테두리를 블랙 하이그로시와 크롬의 투톤으로 둘렀고, 그 속의 매시도 디젤 모델과는 차이가 난다. 라디에이터 그릴 뿐 아니라 안개등 위의 눈썹과 C필러 앞쪽 도어 패널 등 예전에 무광 알루미늄 트림으로 장식했던 부분들은 모두 크롬으로 바뀌었다. 옆모습에서는 같은 18인치에 디자인도 비슷하지만 센터 부분을 검정으로 처리해 강인한 인상이 더해진 휠이 시선을 끈다. 뒷모습에서는 범퍼 아래 트윈 머플러가 존재감을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엉덩이 오른쪽에 T-GDI 엠블렘을 붙였다. 폭스바겐이 TSI 엠블렘에서 SI 글자를 빨간색으로 처리한 것처럼 스포티지는 GDI 글자를 빨간색으로 처리했다. 요즘 현대 기아차가 폭스바겐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티를 좀 심하게 낸 듯하다.
단장을 마칠 때까지 잠시 넋을 읽고 바라보다가 키를 건네 받았다. 실내는 기어 레버 부분의 크롬 링 안쪽 부분까지도 알루미늄 트림으로 마감한 부분이 차이가 나고, 그 외는 별 차이가 없다. 예전에 시승했던 오렌지색 시승차는 실내 곳곳을 오렌지색으로 화려하게 꾸몄던 것이 기억나는데,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화려한 쪽이 스포티지와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시동을 걸고 골목을 빠져 나오는 동안, 아주 조용해진 요즘 디젤 엔진들조차도 결국 완벽하게 따라갈 수는 없는 휘발유 엔진의 조용함이 먼저 다가온다. 그리고 투싼 ix보다 더 단단했던 스포티지 R의 탄력 있는 서스펜션에 대한 기억도 되살아 났다. 엑셀을 누르는 힘을 조금 더하자 매끄럽게 상승하는 토크감이 첫인사를 한다. 첫인상이 좋다.
T-GDI 엔진은 직분사 방식에 트윈 스크롤 터보차저를 더해 2리터의 배기량으로 최고출력 261마력과 최대토크 37.2kgm의 성능을 발휘한다. 미국에서 K5와 쏘나타에 적용된 엔진은 최고출력이 274마력인데 스포티지에 얹힌 엔진은 출력이 조금 낮아졌다. 0~100km/h 가속은 7.1초, 최고속도는 210km/h다. 가속 7.1초는 폭스바겐 골프 GTI의 6.9초, 미니 쿠퍼 S의 7.3초, 볼보 C30 T5의 7.1초와 대등한 실력으로, 매력적인 달리기 성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핫해치 모델들과 적어도 가속력 면에서 당당히 겨뤄볼 만큼 달리기 실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정지상태에서 강하게 가속하면 약간의 휠 스핀과 함께 출발한 후 시원하게 뻗어나간다. 직분사 방식인데다 트윈 스크롤 차저를 더해 터보 레그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출력 상승은 매끄러운 수준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골프 GTI와 비교해보면 체감 가속력은 다소 떨어진다. 시트 포지션이 높고 서스펜션도 상대적으로 부드러운데다, 엑셀에 대한 응답속도도 기대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아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떤 속도 영역에서도, 심지어 150~160 정도의 속도에서도 엑셀에 힘을 주면 토크가 살아있는 재가속이 될 정도로 터보 엔진의 파워는 훌륭하다.
자동 6단 변속기는 50, 85, 130, 170km/h에서 각각 변속하며, 5단 5,500rpm 부근에서 215km/h를 기록하고 더 이상 속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최고속도까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힘겹게 올라가는 느낌이 아니라 꾸준히 밀어 부치는 식이어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최고속 부분을 포함한 전 속도영역에서 재미있게 가속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100km/h로 주행할 때 6단의 회전수는 1,900rpm 부근이다.
서스펜션도 원래 스포티지가 탄탄했던 편이라 고성능 엔진과 어울려 그 진가가 잘 발휘된다. 고속으로 가서도 서스펜션의 안정감은 좋은 편이다. 하지만 탄탄한 서스펜션에도 불구하고 고속에서 불안감이 많이 남아있다. 차체가 뜨는 듯한 느낌은 아니고, 앞머리가 직진 방향을 잘 못 잡고 좌우로 허둥대는 느낌이다. 스티어링이 고속에서 무거워지면서 정교하게 조향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가볍고 유격이 있어 중심을 잘 못 잡고 생기는 불안감이다. 고속으로 코너를 돌거나, 차선을 변경하고 나서 직진을 회복하려 할 때 허둥댐이 심해진다.
이런 스티어링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서는 고속에서 주행할 때 아주 조심해서 정교하게 스티어링을 조작하는 것으로 안정적인 감각을 많이 회복하였다. 자동차가 안정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운전자가 두 팔에 힘을 더 많이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 기아차 측에서는 속도 감응형 스티어링을 적용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속 영역에서 충분히 무거워지지 않는 점은 이제 고쳐져야 할 때인 것 같다.
특히 그 동안은 평범한 페밀리 세단 혹은 그에 준하는 자동차들이 대부분이어서 굳이 고속에서의 안정감을 억지로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면, 이제 달리기 실력이 뛰어난 스포티지 R 터보 GDI를 기점으로 해서 고속 안정감 향상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겠다.
또 한가지 중요한 개선 요구 사항은 변속기의 효율성 및 스포츠성 확대다. 그 동안 현대 기아차 그룹에서 새로운 엔진을 개발해서 제원을 발표하면, 놀랄만한 수치의 출력 성능을 보였지만 실제 차에 적용되었을 때는 비슷한 제원을 가진 유럽 경쟁모델에 비해 실효 성능이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오랫동안 이런 점들을 지켜 보면서 조심스레 그 문제가 변속기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점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엔진이 만들어낸 강력한 파워가 효율적으로 바퀴에까지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최근 현대 기아차 6단 변속기들의 매끄러운 변속은 이제 나무랄 데가 없지만, 직결감이 떨어지는 부분을 좀 더 개선하고, 스포츠 주행에 어울리는 회전수 매칭 기능을 더하고, 거기다 레버 조작감을 조금 더 절도 있게 다듬는다면 최근 선보인 강력한 엔진들과 환상의 궁합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스포티지 R은 K5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수동모드에서 변속기 레버를 조작할 때 조작감이 너무 멍청하다. 레버 조작 후에 밀어닥칠 폭풍 같은 가속을 기대하려면 절도 있는 조작감이 꼭 필요하다. 이번 스포티지 R 터보 GDI라면 아예 수동 변속기를 적용해 유럽 고성능 SUV 못지 않은 운동 성능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매력일 것 같다.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성능을 즐길 수 있는 차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희망사항을 하나 더하자면 포르쉐 카이엔 GTS같은 스페셜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좋겠다. 지금의 엔진과 좀 더 개선된 변속기에다 조금 더 안정적인 서스펜션, 그리고 차별화된 디자인을 적용하면 충분히 매력적인 스페셜 스포티지 R이 될 것이다.
스포티지 R 터보 GDI는 아직까지는 고삐가 느슨하게풀린 망아지다. 터보 2.0 GDI 엔진 자체의 가능성은 이제 확실히 검증되었다고 봐야 하겠다. 하지만 야성은 탁월한데 그 야성을 길들여 줄 고삐가 단단히 조여져있지 않아 아쉽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도로 숙련된 엔지니어링 기술이다. 넘치는 야성을 어떻게 바퀴 위에 고스란히, 그리고 노면에 안정적으로 전달하는가에 대한 엔지니어링 적인 시도와 평가, 그리고 탁월한 성과가 필요한 때가 됐다.
조만간 2.0 터보 GDI, 1.6 터보 GDI 엔진 등을 얹은 다양한 고성능 모델들이 줄줄이 등장해 준다면, 오랫동안 국산 핫해치를 기다려온 매니아들의 갈증이 많이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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