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영 감독의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Pack misuk decides to die)’는 2018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상영작인 단편영화이다. 제목은 호러무비 또는 잔혹동화를 연상하게 만드는데, 로맨틱 코미디와 희망의 메시지 또한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며 영화는 시작하지만 즐겁게 따라가면서 관람할 수 있다. 요즘 젊은 감독의 내면이라는 시야보다는 요즘 젊은이의 시야라고 볼 때 더 와닿을 정도로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슬프고 아픈 영혼들에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감독이 만든 영화가 힐링이 되기를 바란다.
◇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라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는 희망이 없는 세대, 포기라는 말을 타이틀로 달고 사는 세대, 인생 역전을 꿈꿀 수 없는 시대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다.
일어일문학과 출신의 유치원 영어선생님 박미숙(이상희 분)의 독백은 마치 관객의 마음인 것 같은 공감을 줄 것이다. 버려진다는 것, 혼자된다는 것을 박미숙과 신(윤종석 분), 그리고 고양이를 통해서 반복하고 중첩하면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이야기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이 영화는 혼자된다는 것에 대해 억지로 위로하려고 하기보다는 너만이 혼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외로움이 나 혼자만의 외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어른들이 하는 위로의 스타일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동질감 있는 사람들끼리의 스타일을 사용한 것이다.
영화 초반 만화 같은 설정, 영화 중간 스틸사진 같은 느낌은, 사진처럼 그 순간의 느낌에 관객을 잠시 멈추게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라는 말은 살면서 이정표를 찾아갈 수 있는 팁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 망가지는 장면을 불사한 이상희, 초근접 촬영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한강에도 들어간다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를 보면 아직 연기 인생 초반의 여배우를 이렇게 망가뜨려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장면이 많다. 이상희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 망가지는 장면을 불사했고 초근접 촬영도 기꺼이 하고 한강에도 들어간다.
영화 속 황당한 상황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눈빛에는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무표정할 때 툭툭 내뱉는 말은 포인트와 전달력이 있다. 이 영화가 장편영화였으면 이상희의 인생 영화 중 하나라고 뽑아도 될 정도로 거침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를 소화한 이상희를 보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무척 잘 적응해 매력을 발산할 것으로 기대된다. 망가지는 게 추해 보이는 게 아니라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것은 이상희의 큰 장점이 될 것이다.
◇ 박미숙의 트라우마 극복법, 충분히 일리가 있다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박미숙은 여러 가지 트라우마에 잡혀있다. 박미숙은 혈혈단신 외로우며 다니던 유치원에서 원어민 선생님에게 밀려 잘리는 등, 반복된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대인관계 트라우마(interpersonal trauma)’도 있고, 지하철에서 남녀 커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부딪혀 넘어지면서 생긴 ‘쇼크 트라우마(shock trauma), 사건 트라우마(incident trauma)’도 있다.
대인관계 트라우마는 지속된 관계성에서 발생하고 반복됐기 때문에 치유가 더 어려운데, 박미숙에게는 갑자기 나타난 신이 상담사와 같은 역할을 해 도움을 준다. 진짜 신으로 믿기에 마음을 열기도 하고, 대화를 통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치유돼 나간다.
사건 트라우마는 그 사건을 극복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데, 박미숙의 경우 인간관계에서 생겼던 상처가 사건 트라우마 상황에서 더 커졌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닌 상황이지만 그때가 중요한 지점일 수 있다. 지하철에서 여자와 부딪힌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지만 여자와 같이 있던 남자로부터 자기가 비난받기 때문인데, 그때의 억울함은 이전의 대인관계에서의 억울함을 소환해 격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인관계 트라우마를 점점 극복해 가던 박미숙은 사건 트라우마를 줬던 장면에 다시 직면해 같은 장면을 다시 행함으로써 극복해 나간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무척 어려운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선택인 것이다.
박미숙이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터득한 점 또한 희망적이다. 공원에서 “토~~메이~도”를 외치며 하는 행동은, 더 이상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 털어버리겠다는 것을 뜻하는 큰 의미가 있다. 영화를 보면 윤미영 감독은 심리학을 배웠거나, 배우지 않았어도 무척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