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네임 F10으로 구분되는 신형 5시리즈를 통해 국내 첫 선을 보인 가솔린 터보 엔진의 ‘535i’는 사실 구형 5시리즈(E60)에도 존재했던 모델이다. 2007년 BMW가 ‘LCI’라 부르는 부분변경을 거친 이후 미국시장용으로 공급하기 시작한 N54엔진의 535i가 그것.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동일한 엔진을 얹은 335i가 팔리고 있었고 나중에는 Z4, 그리고 신형 7시리즈(F01)를 통해서도 이 엔진을 만나볼 수 있었지만 535i만은 끝내 –적어도 BMW코리아를 통해서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528i, 530i 바로 다음이 550i였던 임기후반 E60의 국내 라인업에서 어딘가 빈 티가 났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신형 5시리즈의 가솔린 라인업이 523i/528i/535i/550i의 네 가지로 정해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550i가 국내 입국을 보류한 가운데 535i가 5시리즈의 우두머리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것이다. 새로운 535i는 구형과 배기량, 최고출력, 최대토크가 같지만, 엔진이 다르다. 이름만 N54에서 N55로 바뀐 것이 아니라 두 개였던 터보가 하나로 줄어버린, 무시 못할 차이가 생겼다. 두 개였던 것이 하나가 됐다니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지만, 실제 성능과 효율 면에서는 진일보를 했다. N54에 빠졌던 밸브트로닉과 가솔린 직분사 기술이 적용된 덕분이다.
결국 N55는 배기가스와 패키지가 개선되고 슬로틀 반응이 빨라졌으며 연료효율이 높아졌다. 최대토크가 나오는 엔진 회전수는 1,300rpm에서 1,200rpm으로 낮아졌다. 무게까지 20kg이 가벼워졌으니 N54와 비교했을 때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것이 없다. 135i, 335i 등 기존에 N54를 얹었던 모델들이 최근 부분변경을 거치면서 차례로 N55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N55가 대체하지 못한 것은 320마력 이상을 내는 N54의 고출력 버전들이다. 시장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미국형 모델들을 기준으로 보면 Z4 sDrive35i와 335i는 N55로 업그레이드 된 반면, 고성능 버전인 Z4 sDrive35is와 335is에는 여전히 N54가 얹히고 있다. 그리고 BMW는 양쪽 모두에 ‘트윈파워 터보’라는 명칭을 써 사람들을 더욱 헛갈리게 만들고 있다. N55는 엄밀히 말해 ‘트윈스크롤 싱글 터보’이지만 여기저기서 ‘트윈 터보’라고 적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3.0리터 터보 엔진을 탑재한 535i는 예전의 540i에 필적하는 성능을 발휘한다. 3.0 직렬 6기통으로 4.0 V8을 잡았으니 제대로 다운 사이징이다. 최고출력(306마력)과 토크(40.8kg.m), 0-100km/h 가속시간(6.1초)까지 뒤지지 않으니 그냥 540i라고 했어도 될걸 그랬다. 같은 3.0 터보 엔진을 얹고도 모르는 척 ‘40’이라는 이름을 써버린 740이 슬쩍 얄밉고도 부럽다. 740i에 얹힌 엔진은 N54중에서도 출력을 높인 버전이긴 하지만 말이다. 위안으로 삼기에는 뭣하지만 740i는 6단 자동변속기를 쓰는 반면 5시리즈의 자동변속기는 죄다 -4기통 2.0엔진의 520d마저도- 8단이다.
같은 N55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를 달고 나온 신형 X5와 비교하면 535i는 가속페달을 급하게 뗄 때 들리는 ‘피유~ 피유~’하는 소리가 훨씬 적고, 작다. 시동을 걸 때나 공회전 중에도 특유의 존재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5시리즈 중에서도 535쯤은 돼야 제대로 된 스포츠 세단 축에 낀다며 나름의 포스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편안함과 스포티함의 양립이라는 면에서는 십분 이해가 가능하다. 535는 그 양면성을 더욱 풍성하게 펼치기 위해 다이내믹 드라이브 컨트롤 기능도 제공하고 있다.
7시리즈에서 봤던 조작부가 그 모양, 그 배치 그대로 적용되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장비는 주행모드를 컴포트/노멀/스포츠/스포츠플러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컴포트/노멀에서는 100km/h에서의 엔진회전수가 1,600rpm에 불과해 정숙하고 부드러운 운전을 즐길 수 있다. 스포츠/스포츠 플러스모드에서는 80km/h를 2,000rpm이상으로 커버하며 가속페달 온/오프 조작에 박자를 맞춰 박력있는 –하지만 여전히 절제된- 소리를 들려준다.
어떤 모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속페달 개도에 따른 엔진 반응속도와 변속 프로그램뿐 아니라 조향 특성과 서스펜션의 단단함까지 바뀐다. 컴포트에서는 가속페달을 급하게 밟아도 차가 무디게 나가고 스티어링휠은 부담을 쫙 빼 가볍게 돌아간다. 이때 부드러워진 다이내믹 댐퍼 컨트롤이 노면의 잔 충격을 흡수해내는 작업을 18인치 휠 타이어 조합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날카로운 이빨을 완전히 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재적인 단단함은 스포츠세단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작정을 하고 스포츠, 혹은 스포츠플러스 모드를 선택하면 스티어링 휠을 잡은 팔에 힘부터 달라진다. 특히 7시리즈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DSC경고등부터 점등시키고 시작하는 스포츠플러스 모드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요소다. 변속패들이 달린 535i의 스포츠 스티어링휠은 쥐는 부분이 두툼해 듬직하다. 더불어 옆구리 조임을 전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시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변속레버를 수동모드로 이동한 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니 회전계 바늘이 7,000rpm, 혹은 그 이상을 쳐야 다음 단으로의 자동 변속이 이루어진다. 그 시점에서조차 엔진소리가 곱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하지만 흥분제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 60, 90, 135, 170, 그리고 225km/h… 거칠게 밀어붙여도 신뢰도가 높은 주행감과 고속에서의 안정감이 535i를 아래급 버전들과 차별화시킨다. 안티롤바를 비틀어 차체 쏠림을 능동적으로 줄여주는 다이내믹 드라이브, 그리고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테그럴 액티브 스티어링이 5시리즈, 535i의 은폐된 병기다.
이번에 처음 도입된 전동식 파워스티어링은 어느 때보다도 효율향상에 대한 압박이 심한 요즘 자동차업계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중 하나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렇다 할 불만사항은 감지하지 못했다. 편하고, 자연스러우며, 필요할 때는 충분히 직결된 느낌을 준다. 스티어링 휠은 끝에서 끝까지 3바퀴가 돌아간다. 한쪽으로 완전히 감으면 BMW 마크가 180도로 뒤집힐 때까지 돌아간다는 얘기.
이것은 523i, 528i와도 동일한 내용이지만, 이번 535i 시승차의 경우에는 좁은 공간에서 운전대를 많이 돌리며 이동하는 경우 조금씩 이상할 때가 있었다. “엥? 이만큼만 돌려도 돌아 나갈 수 있나?” 저속 주행 시 앞 바퀴의 조향 방향과 반대로 뒷 바퀴들을 틀어 회전반경을 줄여주는 인테그럴 액티브 스티어(옵션)의 효과. 일종의 축지법을 경험하게 된다. 속도가 높아지면 이와 반대로 앞뒤 바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고속 차선변경과 같은 상황에서의 주행안정성을 높여준다. 자동차 기술도 돌고 도는 것 같다.
535i는 국내 판매용의 5시리즈 중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만큼 실내외 사양 면에서도 523i나 528i와는 격이 다르다. 535라야 트렁크를 전동으로 닫을 수 있고, 뒷좌석 등받이를 접어 짐도 더 많이 많이 실을 수 있다. 하다 못해 스피커도 528보다 10개가 더 많은 16개이고, 천장과 기둥 마감도 까무잡잡한 BMW 인디비주얼 사양으로 차별화했다.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실내 무드 조명도 535에만 달린다.
535에는 코너링 시 조사각이 바뀌는 어댑티브 헤드라이트가 적용되었고, (528에는 모양만 있는) 안구세척 기능도 달렸다. 듀얼 머플러는 그렇다 치고, 도어손잡이에 7시리즈처럼 크롬 장식이 들어간 것도 523, 528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E60 535i는 배기구가 왼쪽에만 있었다.- 터빈 형상의 잘생긴 (하지만 실제치수만큼 커 보이지는 않는) 18인치 휠은 앞뒤 타이어 폭을 달리해 좀더 본격적인 인상을 준다. 17인치 휠에 앞뒤 동일한 사이즈의 타이어를 끼운 아랫것들과는 노는 물이 다르다는 표시다.
528에 달린 자동주차장치는 당연히 빠져있다. 성별, 연령, 계급 초월의 대중성을 꾀한 528과 달리 535는 평행주차 정도쯤은 눈감고도 척척 해내는 엘리트 운전자들을 위한 차다. 대신 –정말로 눈을 감지는 말라는 뜻에서- 다섯 개의 카메라를 달아놨다. 사이드미러 하단의 카메라들은 후방 카메라와 함께 절묘한 서라운드 뷰를 구성하고, 앞바퀴 휠하우스 모서리에 달린 사각지대용 카메라들은 골목길 교차로에서 방어운전용으로 요긴한 시야를 제공해준다.
535도 컴포트 액세스는 적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도어록은 리모컨으로 풀어줘야 한다. 대신 도어 외부 손잡이에는 앞뒷문 모두 하얀색 LED조명이 켜지고, 도어를 닫을 때는 살짝 만 걸쳐주어도 스르르 물고 들어가는 소프트 클로징 기능이 적용됐다. 앞좌석 시트는 컴포트 사양으로, 통풍기능, 등받이 윗부분 각도를 따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허벅지 받침을 앞으로 잡아 빼 조절할 수 있다. 아랫것들의 시트에는 없는 요추받침 조절기능도 달렸다.
차이가 가장 명쾌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뒷좌석에서다. 뒷좌석용 송풍구가 B필러 주변에 한 세트 더 달렸고 실내 온도도 뒷좌석 좌우 측을 따로 조절할 수 있도록 아예 에어컨 조작부를 갖춰놓았다. 물론 528i에 빠진 시트 열선 기능도 챙겼다. 당연히 햇빛가리개까지 갖췄어야 했는데 왜 빠졌을까… 5시리즈는 뒷좌석용으로 쓰기에 애매한 위치이긴 하다. 중국형 롱버전 5시리즈처럼 휠베이스가 더 길고 등받이 각도도 조금 더 눕힌다면 모를까.
하지만 뒷좌석에 연연할 것 같으면 그란투리스모라고 하는 좋은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5시리즈에 목멜 일이 아니다. 그란투리스모는 5~7시리즈 세단과 같은 플랫폼에 535i와 동일한 구동계를 얹었고, 차체가 더 커서 뒷좌석이 7시리즈 부럽지 않게 넓다. 사양은 동등한 정도를 넘어 535i가 빼먹은 차선이탈 경보기능과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뒷좌석 햇빛가리개까지 모두 챙겨 넣었으니, 535i를 타보고 ‘조금 아쉽네’했던 이들이 군침을 삼킬 만 하다.
여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가격이다. 그란투리스모 익스클루시브 버전은 535i(9,590만원)보다 천만 원이 비싸고 기본형은 2천 만원이 싸게 나와서 협공을 펼치니 ‘BMW코리아의 535i 죽이기 전략’이라는 해괴망측한 얘기가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행히, 그란투리스모는 5시리즈보다 못생겼고, 스포츠세단도 아니다. 하지만 535i가 점유하고 있는 5시리즈의 기함자리를 심히 위협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란투리스모의 풀 네임은 `5시리즈 그란투리스모`이므로...
글 / 민병권 (RPM9.COM에디터)
사진 / 박기돈 (RPM9.COM팀장)
총 주행거리 7천km를 넘긴 시승차는 7.4km/L의 시승구간 평균연비를 기록했다.